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중잠(仲潛). 아버지는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를 역임한 이집(李集)이다.
1382년(우왕 8) 과거에 급제, 중서문하성의 녹사(錄事)를 거쳐, 1392년(태조 1) 기거주(起居注)로서 조선 건국에 참여하였다. 특히, 이방원(李芳遠)의 측근이라는 이유로 1393년 정도전(鄭道傳) 일파에 의해 탄핵, 순군옥(巡軍獄)에 투옥되기도 하였다. 그 뒤 이방원이 즉위해 정권을 잡자 사헌부장령으로서 풍기단속과 공신세력 제거에 앞장섰다.
1407년(태종 7) 문과 중시에 급제, 예문관직제학에 특별히 제수되었고 전토 40결을 하사받았다. 이어 판선공감사(判繕工監事)를 지내면서 창업 초기의 궁궐 수축에 힘썼으며, 외직으로 수원부사가 되어 민정을 직접 다스렸다.
1411년 예조우참의로서 충청도·전라도 경차관에 임명되어 민정을 순찰, 탐학을 저지른 전라도수군도절제사 홍유룡(洪有龍), 임실감무 최참(崔漸), 당진감무 임을생(任乙生)을 탄핵해 파직시켰다.
그 뒤 이조참의·예문관제학을 역임하고, 1416년 한성부윤이 되어 도성의 살림을 주관하였다. 이듬 해 경상도관찰사를 역임한 뒤, 호조참판·형조참판을 지냈다.
1419년 세종이 즉위하자 하정사(賀正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평안도도관찰사·이조참판을 역임하고 다시 호조참판이 되어 재정 체계를 바로 하는 데 힘썼다.
1420년(세종 2) 호조판서, 이어 예조판서·대사헌·의정부참찬을 지내고 1425년 중군도총제(中軍都摠制)가 되어 군권을 총지휘하다가 곧 신병으로 사임하였다.
성품이 단정하고 검소했으며, 특히 재정 부서에 오래 근무했음에도 결코 축재에 관심이 없었다. 문장에 능했고, 행정 업무에 있어 결단력이 있었다. 후사가 없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