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경주(慶州). 아명은 씨종(氏鍾), 호는 명재(命齋) 또는 월양(月洋). 경기도 양평 출신. 오복(五福)의 아들이며, 한글학자 이갑(李鉀)의 형이다.
8세 때 아버지로부터 한문(漢文)의 기초를 닦은 다음 향리에서 한문을 수학하다가, 1916년 경신학교(儆新學校)에 입학하여 장지영(張志暎)으로부터 조선어문법 강의를 들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만주 집안현(集安縣)으로 건너가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사관연성소(士官鍊成所)를 졸업하고 그 해 10월 청산리전투에 참가하였다.
1923년 8월 화전현(樺甸縣) 화림학교(樺林學校)에 부임하여 교편을 잡았다. 1924년 9월 『신단민사(神檀民史)』 보급건으로 검거되어 청진지방법원에서 3년징역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1926년 12월 가출옥하여 양평으로 귀향하였다. 1928년 정주 오산학교(五山學校)에서 근무하다가 1936년에 사직하였다.
1945년 9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 부임하여 1961년 9월 정년퇴직까지 국어학을 강의하였다. 1932년 한글학회 회원으로 가입하여 한글맞춤법통일안제정위원·표준말사정위원 및 이사를 역임하였다.
국어의 음운·문자·어원 및 국어의 발달에 관한 논문 중 「언어상(言語上)으로 고찰한 선사시대의 환하문화(桓夏文化)의 관계」·「한국어와 중국어에 공통한 계통적 음운법칙」·「향가신해독(鄕歌新解讀)」·「어학적으로 고찰한 우리 시가 원론」 등 7편을 회갑기념논문집 『국어학논고』(1958)에 수록하였다.
그 뒤로도 「이두(吏讀)의 근본적 해석」(『일석환갑기념논문집』), 「언어상으로 고찰한 우리 고대 사회상의 편모」(『한글』124호), 「‘·’음가의 새로운 고찰」(『동방학지』5집), 「국어 어원풀이의 일단」(『한글』 140호) 등을 발표하였다.
1968년 대통령표창, 1991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