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함평(咸平). 갑산부사 이윤탕(李允宕)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좌참찬 이염(李琰)이고,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이수원(李守元)이며, 어머니는 김해허씨(金海許氏)로 별좌(別坐) 허임필(許霖弼)의 딸이다.
1618년(광해군 10) 무과에 급제, 북방을 지켰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때에 훈국장관(訓局將官)으로 공을 세워 당상관으로 가자되고 정사공신(靖社功臣) 3등에 책록되었으며 함녕군(咸寧君)에 봉해졌다.
장단부사가 된 뒤 계속 승진하여 내직으로는 훈련도감·포도대장, 외직으로 충청도·경기도·함경도·평안도병마절도사 등 주로 북방지방의 병사를 10년간에 3차나 역임하였다.
1636년 12월 청병의 침입으로 인조가 남한산성에 몽진하였을 때 종성의 행영(行營: 장군 등이 출정하여 임시로 멈추는 곳)에 있다가 청병의 침입소식을 듣고 서울로 달려왔으나 군대를 이끌고 진(鎭)에 돌아가라는 왕명을 받았다.
대간들이 서울 구원이 늦은 장수들의 죄를 추론(追論)할 때 각 도 장수들과 함께 파직되어 곽산 능한성(凌漢城)에 유배되었다가 수개월 만에 병을 얻어 사망하였다. 인조는 그가 죽자 슬퍼하며 그의 관직을 복구시켰다. 김진규(金鎭圭)가 묘갈명을 지었다. 시호는 경무(景武)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