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성보(誠甫). 헌납(獻納) 이형(李逈)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영휘(李永輝)이고, 아버지는 이택(李澤)이다. 어머니는 김여남(金汝男)의 딸이다. 1713년(숙종 39)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19년 남원현감을 지냈다. 1722년(경종 2)에는 부수찬(副修撰)·부교리(副校理)·수찬(修撰)을 역임했으며 이듬해에는 교리(校理)를 역임하였다.
1724년(영조 1) 의주부윤(義州府尹)을 지내면서 그 곳이 국방 요지임을 강조하고 아울러 보다 합리적인 정책을 시행하여 만전을 기할 것을 주장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책문(柵門)과 소곶관(所串館) 사이의 7대참(大站)을 의주부의 독단으로 담당하기에는 문제점이 있으므로 이에 대해 우휼지전(優恤之典: 두터운 은혜를 베풀어 구제하는 방법)의 시행과 구적(舊糴: 지난 날의 갚아야 할 환곡)의 탕감 및 오래 근무 가능한 장교(將校) 선발 등과 같은 대비책을 강구해야 한다.
둘째, 백마산성(白馬山城)으로 읍을 옮기든가 아니면 무기와 군량만이라도 이송하여 청야법(淸野法: 들판의 온갖 곡식을 거두거나 가옥을 철거하여 비상시 적의 양식 또는 근거지를 빌미를 주지 않게 하는 법)을 실시, 유사시에 대비해야 한다.
셋째, 의주부는 기타 지역과는 달리 평원이 많고 직로(直路)이므로 거자고(車子庫: 운송 수단의 보관을 위한 창고)를 설치하여 평시에는 방물이라든가 각 읍의 쇄마(刷馬: 각 지역에 관용으로 배치한 말)를 운반하는 수단으로 이용하고, 유사시에는 전차를 사용하여 적을 격퇴할 수 있는 방어의 거점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1727년에 병조참지(兵曹參知)를 지냈으며, 이듬해 승지(承旨)를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