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흘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장단부사, 종부시정, 지제교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상중(尙中)
설정(雪汀), 오계(梧溪)
시호
충장(忠章)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68년(선조 1)
사망 연도
1630년(인조 8)
본관
경주(慶州)
주요 관직
공조정랑|배천군수|지제교
관련 사건
임진왜란|정묘호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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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후기에, 장단부사, 종부시정, 지제교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상중(尙中), 호는 설정(雪汀)·오계(梧溪). 이은신(李殷臣)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흥(李興)이고, 아버지는 부사과 이천일(李天一)이며, 어머니는 남양 홍씨(南陽洪氏)로 홍염(洪濂)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89년(선조 22) 생원시에 합격하고, 1591년(선조 24)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학유가 되고, 다음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가주서로 왕비를 해주에 호종하였다. 1594년(선조 27) 홍문관에 등용되고 이듬 해 승문원정자·저작·박사 등을 거쳐 전적에 올랐다.

1597년(선조 30) 문과 중시에 을과로 급제하고, 지평, 문학을 거쳐 공조정랑이 되었다. 그 해 왜적이 재침하자, 중국어에 능통해 명장(明將) 진우충(陳愚衷)과 함께 울산에서 왜적을 치는 데 공을 세웠다. 그 뒤 전라도도사로 춘추관기주관을 겸하고, 다시 형조정랑이 되었다.

이어 보령현령에 임명되었으나 친상(親喪)을 당해 부임하지 못하였다. 1606년(선조 39) 황해도도사를 거쳐 배천군수 때에 관에서 봄에 백성들에게 관곡을 빌려주었다가 가을에 10배를 거두어들이는 악습을 폐지하였다.

1614년(광해군 6) 장단부사, 1621년(광해군 13) 종부시정(宗簿寺正)을 거쳐 1623년(광해군 15) 인조반정 후에 지제교가 되었으며,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는 왕을 강화에 호종하였다.

1629년(인조 7) 사은사가 되어 동지사(冬至使) 윤안국(尹安國)과 함께 배를 타고 명나라에 가다가 풍랑을 만나, 윤안국은 익사하고 그만 홀로 살아서 하표(賀表: 명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조선에서 올리는 축하의 글)와 변무주문(辨誣奏文: 명나라에서 오해하는 일을 바로잡도옥 변론하는 글)을 전달한 뒤 그 곳 옥하관(玉河館)에서 죽었다. 좌찬성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장(忠章)이다.

저술활동

저서로는 『관주일록(觀周日錄)』·『오계문집(梧溪文集)』이 있다.

참고문헌

『선조실록(宣祖實錄)』
『인조실록(仁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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