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무경(茂卿). 이통(李通)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예조참판 이경헌(李景憲)이고, 아버지는 목사 이석유(李柘斞)이며, 어머니는 승지 심로(沈로)의 딸이다.
12, 13세에 경사(經史)의 뜻에 통했고 약관에 진사가 되었으나 문과에는 번번이 실패하였다. 1681년(숙종 7) 희릉참봉(禧陵參奉)이 되고, 1689년 영평현감이 되었으나 관찰사와 마음이 맞지 않아 사직하였다. 1691년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지평(持平)·정언(正言)·헌납(獻納) 등을 거쳐, 1695년 동래부사가 되었다.
이듬 해 홍문관(弘文館)에 등용된 후 보덕·강릉부사·사간(司諫)을 지내고, 1698년 시독관(侍讀官)으로서 사전(私錢)의 주조를 엄금하도록 건의하였다. 그 뒤 승지를 지내고, 당쟁은 나라를 망치게 하는 근원이라 하여 배격하였다.
1702년 강원도관찰사 때 양구현 등 여러 군현이 사옹원(司饔院)에서 그릇을 굽기 위해 요구한 백토(白土)의 상공(上供)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에 양구 지역의 백토가 고갈되어 백성들이 괴로움을 당하는 점을 상소해 면제받도록 하여 백성들의 칭송을 듣기도 하였다. 또한 대사간 때 정식(鄭栻)이 이이명(李頤命)·조태채(趙泰采)를 탄핵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이 사건을 편협하게 처리한 사간 윤헌주(尹憲柱)를 탄핵해 파직시켰다.
그리고 신완(申琓)이 사복시(司僕寺)를 관장할 때 간사한 무리의 말을 듣고 당진·태안의 민전(民田)을 빼앗자, 그를 탄핵해 백성들에게 되돌려주게 하니 백성들이 송덕비를 세웠다. 1705년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와 이조참의가 되고, 이어 호조참판을 거쳐 1707년 개성유수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