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윤유(林允蕤)의 아들이다.
원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장흥부사가 되었다. 낭장 노진의(盧進義)의 딸을 둘째처로 삼았다가 파면되었다.
충렬왕 때 정랑을 제수하였으나 감찰시사 김홍미(金弘美), 좌사간 이행검(李行儉) 등이 고신(告身)에 서명을 거부하였다. 이에 응방(鷹坊)에 아부하여 왕명으로 서명을 독촉하였으나 끝내 이들이 거부하므로 왕에게 호소하여 해도(海島)로 귀양보냈다.
얼마 뒤 전라도왕지사용별감(全羅道王旨使用別監)이 되어 가혹하게 백성을 수탈하여 원성이 높았으나, 뇌물을 잘 바쳐 왕의 총애를 받았다. 이어 전라도안렴사가 되어 백성의 재물을 수탈하였다.
1287년 우부승선이 되었으며, 이 해에 과거의 고시관이 되었으나 출제를 잘못하여 유생들의 비웃음을 샀다. 이어 부지밀직(副知密直)이 되고, 이듬해 감찰대부(監察大夫)에 올랐다. 학술에는 어두웠으나 아전으로서의 재능은 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