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해방 이후 나전칠기공예조합장,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심사위원 등을 역임한 공예가. 나전칠기공예가.
내용
1933년 제12회 선전(鮮展, 朝鮮美術展覽會)에 「나전연상(螺鈿硯箱)」을 출품하여 첫 입선하였고, 이듬해에 「당초무늬탁자(唐草模樣卓子)」로 첫 특선하였으며, 제14회에 입선하고 제15·19·23회에 다시 특선하여 공예가로서의 위치를 굳혔다.
1945년 조선미술협회 공예부 창립회원, 1946년 조선나전칠기공예조합 창립평의원으로 참가하여 공방경영을 본격화하면서 제품 생산에 힘썼고 나중에 나전칠기공예조합장을 역임하였다.
1949년 창설된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 국전]의 추천작가가 되었고, 제4회 때 초대작가가 되었다. 1956∼1960년까지 5차례 국전심사위원을 역임하면서 3차례 출품하였다. 1959년 공예동인전에도 참가하고, 제8회 서울시문화상[공예상]을 수상하였으며, 서라벌예술대학 공예과 강사를 역임하였다.
과묵, 온화한 성격에 호주가였던 그는 나전칠기공예가인 김진갑과 가장 절친한 사이였고, 목공예가 박성삼(朴星三), 화가 이상범(李象範)·도상봉(都相鳳)·노수현(盧壽鉉) 등 미술인들과 교우의 폭이 넓었다.
그의 작품은 조선조 전통의 경향을 뛰어넘는 것은 아니었으나, 주름질기법뿐만 아니라 부조 효과의 조패기법(彫貝技法)을 능숙하게 구사하여 새로운 입체적 무늬 표현을 시도하였으며, 무궁화·석류·농악대 등 토속적 무늬를 즐겨 사용하였다.
특히, 1948년경 바가지를 테두리에 이용하여 만든 쟁반·과자기 등의 나전칠기 제품은 장안의 인기상품으로 10여 년 동안 유행을 가져왔다.
그는 일본 칠기기법인 마키에[蒔繪]에도 매우 능하였으나, 주된 기법으로는 나전기법에 큰 애착을 보이면서 생활제품의 생산에 역점을 두었던 장인적(匠人的) 공예가였다. 61세 때 닥친 심장병으로 별세하였다.
참고문헌
- 『한국현대미술사(韓國現代美術史) -공예(工藝)-』(국립현대미술관, 1975)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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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 금·은가루를 칠기 표면에 뿌려 만든 공예품이나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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