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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식가루를 시루에 찌거나 삶아 모양을 빚어 먹는 음식.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떡은 곡식가루를 시루에 찌거나 삶아 모양을 빚어 먹는 음식이다. 처음에는 단순히 곡식가루를 시루에 쪄서 먹었지만 고물을 묻히는 등 다양한 제조방식이 발전했고 조선시대에 현재와 같은 조리·가공법이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의 문헌에는 시루떡인 증병, 절구로 쳐서 만든 도병, 기름에 지진 유전병, 반죽하여 물에 삶아 건진 단자, 그 밖에 빈자떡·상화병 같은 떡이 확인된다. 원래의 한자표기는 이(餌)로, 밀가루로 만든 떡은 따로 병(餠)이라 표기했는데 우리는 모두 병으로 표기한다. 현대에 들어 서양식 식생활이 전래되면서 떡의 사용빈도는 크게 줄고 있다.

목차
정의
곡식가루를 시루에 찌거나 삶아 모양을 빚어 먹는 음식.
내용

우리나라에서 언제부터 떡을 만들어 먹기 시작하였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원시농경의 시작과 함께 행해진 것으로 추측된다.

우리나라 최초의 곡물요리는 곡물을 연석에 갈아서 분쇄한 다음 옹배기에 담고 물을 부어 가열한 이었으나, 당시의 토기는 오늘날처럼 단단하지 못하여 죽이 될 때까지 장시간 가열하면 토기의 흙냄새가 죽에 옮겨져 맛이 나쁘게 되므로 시루가 생겨남에 따라 곡물을 시루에 찌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

낙랑유적에서는 청동제의 시루와 토기로 된 시루가 발견되고 있으므로 당시의 대표적 곡물인 · 기장 · · 보리 · 과 같은 곡물을 가루로 하여 시루에 찐 지금의 시루떡과 같은 음식을 만들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밖에 · 등도 함께 넣어서 지금의 고사떡이나 수수팥경단과 같은 음식도 만들었을 것이다.

중국에서는 밀가루 보급의 경계가 되는 한나라 이전과 이후에 떡을 가리키는 글자가 달라진다. 즉, 밀가루가 보급되기 이전에는 떡을 이(餌)라 표기하고 · 기장 · 조 · 콩 등으로 만들었는데, 밀가루가 보급된 이후에는 밀가루로 만든 떡은 따로 병(餠)이라 표기하게 된 것이다.

이에 의하면 현재 우리나라에서 만드는 떡은 쌀을 위주로 만들므로 이(餌)라 표기하여야 마땅하나, 이러한 구분 없이 떡 전체를 가리켜 병이류라고 하고 있으며, 병이라는 표현을 주로 쓰고 있다.

(1) 삼국시대 및 통일신라시대

삼국시대 고분에서는 시루가 발견되며, 고구려 고분벽화에는 시루로 음식을 찌고 있는 주방의 모습이 분명하게 그려져 있다.

이것으로 미루어 시루는 주방에서 쓰이는 상용용구였으며, 시루에서 익힌 음식인 떡이나 찐밥이 상용음식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찐떡을 절구에 쳐서 만든 인절미나 기름에 지진 유전병 등도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삼국사기』 유리왕조의 “병(餠)을 물어 잇자국을 시험한즉 유리의 잇금이 많은지라 군신들이 유리를 받들어 임금으로 모셨다.”라는 내용도 잇자국이 선명하게 남을 수 있는 인절미나 절편과 같은 친떡이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는 “조정의 뜻을 받들어 그 밭을 주관하여 세시마다 술 · 감주 · 떡 · 밥 · 차 · 과실 등 여러 가지를 갖추고 제사를 지냈다.”라고 되어 있어 떡이 제수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이 밖에 우리의 상고시대 음식을 전수하여간 것으로 알려진 일본의 문헌에 대두병 · 소두병 · 전병 등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시루떡 · 도병 · 전병들이 상용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2) 고려시대

고려는 건국 초기부터 권농정책에 힘을 써 양곡의 증산을 이룩하였다. 이렇게 양곡이 증산되면서 쌀밥이 보급되었을 뿐 아니라 떡 · 조과류가 발달, 성행하게 되었다. 또 농산물의 증산으로 인한 경제적인 여유와 함께 불교의 성행으로 육식절제와 음다의 풍습이 발달하여 더욱 떡이 발전하게 되었다.

고려 후기에는 몽고의 영향하에 있으면서 많은 문화교류를 하게 되어, 원나라로부터 상화병이 수입되었고 고려병이 수출되기도 하였다.

원나라 문헌인 『거가필용(居家必用)』에는 을 그늘에 말려서 껍질을 벗긴 뒤 찧어 가루를 내고 여기에 찹쌀가루를 3분의 2 정도 섞은 다음 꿀물에 넣어 축인 것을 쪄 익혀 먹는 고려율고(高麗栗餻)가 소개되어 있다.

『목은집(牧隱集)』에는 유두일에 먹는 단자병과 점서(粘黍)에 관한 시가 수록되어 있으며, 『지봉유설(芝峯類說)』에는 고려에서 상사일에 쑥떡을 으뜸으로 했다는 내용이 있어 떡이 절식으로 자리잡게 되었음을 알려 주고 있다.

『고려사』 열전 최승로조(崔承老條)에는 광종이 내도장의 떡으로 걸인에게 시주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신돈조(辛旽條)에서는 신돈이 떡을 부녀자에게 던져주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떡이 일반에게 널리 보급되었음을 아울러 알 수 있다.

(3) 조선시대

초기부터 농서를 간행하여 농산물의 증진을 꾀하였다. 또한 조리가공법이 전대에 비하여 세분화되고 다양해졌으며, 기법도 과학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특히 현재 우리가 먹고 있는 대부분의 떡을 조리, 가공하는 방법이 확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시대의 문헌을 보면 만드는 방법에 따라 증병(甑餠) · 도병(擣餠) · 전병(煎餠) · 단자류(團子類) · 빈자떡 · 상화로 분류하여 다양한 종류의 떡을 수록하고 있다.

(4) 근대 이후

19세기말에 접어들면서 서양의 식품이나 조리법, 식생활 관습이 전해지게 되어 우리 고유의 식생활에 큰 변화가 생기게 되었다. 따라서 전통적인 조과와 떡도 양과자가 전해지면서 사용빈도가 줄어들었다.

특히 방앗간의 증가로 가정에서 일일이 만들어야만 했던 떡이 가루내기부터 쪄오기까지 사회화되었으며, 이미 제조된 것을 사다가 먹기에 이르렀다.

우리나라에서 떡이 가장 발달하였던 때는 조선시대이다. 이 시대의 문헌에 수록된 떡의 종류를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증병(시루떡) : 곡분을 시루에서 익힌 떡으로 시루의 등장시기부터 우리나라 떡의 원형을 이루어온 것이라 여겨진다.

증병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은 백설기『성호사설』에서도 “지금도 설기를 숭상한다. 가례에 쓰는 자고(餈糕)가 이것이다. 또, 멥쌀가루에 습기를 준 다음 시루에 넣어 떡이 되도록 오래 익힌다. 이것을 백설기라 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시루떡에는 백설기법을 기본으로 하여 대두증병(大豆甑餠) · 나복병(蘿葍餠) · 잡과병(雜果餠) · 도행병(桃杏餠) · 율고(栗糕) · 도병(桃餠) · 당귀병(當歸餠) · 상자병(橡子餠) · 산삼병(山蔘餠) · 유엽병(楡葉餠) · 애병(艾餠) · 후병(厚餠) 등이 있었다.

② 도병(친떡) : 곡류를 그대로 또는 가루내어 익힌 다음, 안반이나 절구에서 매우 쳐서 만든 떡이다. 『성호사설』에서는 “혹은 먼저 익힌 다음에 이것을 잘 치고 여기에 콩을 볶아서 가루로 만든 것을 묻힌다. 지금 풍속의 인절미다. 후세에는 점점 사치스러워져서 이것을 제향에 쓰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도병 중에서 원초형의 것은 인절미라고 추정할 수 있다. 그 뒤에는 여러가지로 다양하여져서 찹쌀로 만든 떡인 인절미 · 잡과찰편 · 석이찰편 · 혼돈병 · 송고유밀병(松膏油蜜餠)이 있었고, 멥쌀로 만든 떡인 흰떡 · 절편 · 차륜병(車輪餠) · 설병 · 송피병 등이 있었다.

『음식디미방』에서는 “인절미 속에 엿을 한치만큼 꽂아 넣어두고 약한 불로 엿이 녹게 구어 아침이면 먹는다.”고 하여서 인절미가 상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③ 유전병(油煎餠) : 곡분을 반죽하여 기름에 지진 떡으로, 계절에 따라서 진달래꽃 · 장미꽃 · 배꽃 · 국화꽃 등을 전병 위에 붙여 지진다. 이것을 화전(花煎)이라 한다. 지진떡에는 두견화전 · 장미화전 · 국화전 · 진감전 · 토지병(土芝餠) · 주악 등이 있었다.

단자(團子) : 찹쌀가루를 물에 반죽하여 끓는 물에 삶아 건진 떡이다. 『임원경제지』에서는 “경단 모양이라 찹쌀가루를 물로 반죽하여 도토리알만하게 또는 밤만하게 둥글게 빚어서 만든다.”라 하였다.

고물의 종류는 콩고물 · 계핏가루 · 거피팥고물 · 거피녹두고물 · 흑임자 · 깨 · 잣가루 · 싱검초가루 등 다양하였다. 또 향애단자처럼 쑥을 찧어서 쌀가루와 함께 반죽하여 삶아 고물을 묻혀 만들기도 하였다.

⑤ 기타 : 빈자떡 · 상화병 등이 있었다. 빈자떡을 『음식디미방』에서는 “거피한 녹두를 가루내어 되직하게 물을 섞고, 부칠 때에는 기름이 뜨거워진 다음에 조금씩 떠 놓고 그 뒤에 꿀을 반죽한 거피팥소를 얹고 그 위에 다시 녹두가루를 얹어 지진다.”고 하였다.

『규합총서(閨閤叢書)』에 수록된 방법도 같은 방법인데, 떡 위에 백자와 대추를 고명으로 박아 지지는 점이 다르다. 『조선상식(朝鮮常識)』에서는 빈자떡의 어원이 병저(餠餻)에서 온 듯하다고 하였으므로, 처음에는 떡의 하나이었던 것이 찬물에 가까운 지짐으로 변하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

상화는 고려시대에 원나라에서 전래된 것으로 19세기경까지도 귀한 음식으로 칭송받았다. 『음식디미방』에서는 “모시에 친 고운 밀가루를 술로 반죽하여 적당하게 발효시켜 부풀게 한 다음 팥소나 채소로 속을 넣어 잰다. 상화반죽에 쓰는 술은 밀기울 3되에 쌀 한줌, 누룩 5홉을 함께 섞어 담갔다가 3일 만에 밭쳐 쓴다.”고 하였다.

우리나라의 떡은 제례 · 빈례(賓禮)를 비롯하여 대소연의 · 농경의례, 토속신앙을 배경으로 한 각종 행제, 무의 또는 계절에 따라 즐기는 절식 등에서 일차적으로 앞서는 음식이며, 토착성과 전통성이 가장 깊은 음식이라 할 수 있다.

『조선상식』에서는 동양 삼국의 떡의 특징으로 중국에서는 밀가루를 주재료로 하여 굽는 것이 본위요, 일본에서는 찹쌀가루를 주재료로 하여 치는 것이 본위인데, 우리나라에서는 멥쌀가루를 주재료로 하여 찌는 것이 본위라고 하였다.

떡은 가장 대표적인 별식으로, 우리 속담에 “밥 위에 떡”이라는 말이 있다. 마음에 흡족하게 가졌는데도 더 주어서 그 이상 더 바랄 것이 없을 만한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밥보다는 떡을 한층 맛있는 음식으로 생각하게 하는 이 속담에서 떡이 별식이었음을 알 수 있다.

“밥 먹는 배 다르고 떡 먹는 배 다르다.”고 할 정도로 떡배를 따로 찼던 우리의 생활은 “떡방아소리 듣고 김칫국 찾는다.”, “떡 줄 사람은 꿈도 안 꾸는데 김칫국부터 마신다.”는 속담을 낳기도 했다. 별식이며 동시에 간식이 되기도 하는 떡은 계절적으로는 가을과 겨울철에 주로 많이 해놓고 먹었다.

추수한 뒤 비가 오면 밖에 나가 일을 할 수도 없고 곡식은 넉넉하니 집안에서 떡이나 해 먹고 지낸다 하여 “여름비는 잠비, 가을비는 떡비”라고도 했다.

또한 겨울철에는 인절미를 해두었다가, 화로에 석쇠를 올려놓고 딱딱하게 굳은 인절미를 구워 조청이나 홍시에 찍어 먹었으니, 그 맛이 겨울 정취의 으뜸이며 별미였음은 말할 것도 없다. 이런 별식의 떡은 이웃과 친지와 함께 나누어 먹는 것이 풍속으로 되어 있었다.

그래서 떡을 하는 여유를 보이는 집에서는 자기 집 식구만을 위하여 떡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집과 친척집에 나누어주기 위해서 많은 양의 떡을 하게 마련이었다. “남의 떡에 설 쇤다.”는 말과 함께 “얻은 떡이 두레반이다.”라는 속담은 바로 떡을 하면 나누어 먹던 풍속을 단적으로 잘 나타내 주고 있는 말이다.

떡은 별식이나 간식으로서 뿐 아니라 잔치나 제사의 중요한 진설품이기도 하다. 특히 잔치 때에 올리는 떡은 맛을 즐기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보이기 위하여 상차림에 쓰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일정한 모양으로 예쁘게 떡을 만들기 위한 기구도 고안해 내어 다식판처럼 나무토막에 무늬를 조각한 나무떡쌀이나 자기떡쌀 등을 사용하였다.

제사상에도 떡이 진설되는 점으로 보아 귀신도 산 사람처럼 밥보다 떡을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집안 귀신들의 장난으로 집안이 항상 불화하고 사나운 일만 계속되는 집을 ‘떡 해먹을 집안’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귀신을 위해 떡을 하여 고사를 지내야 한다는 뜻으로 이르는 말이다.

집안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나라가 뒤숭숭할 때에도‘ 떡 해먹을 세상’이라고 하였다. 무당이 굿을 할 때에도 떡이 사용되었다. 이 때의 떡은 팥고물을 얹은 팥시루떡으로, 시루째 상에 올려놓은 뒤 시루 위에는 큰 삼지창을 꽂았다.

이렇듯 귀신에게 제물로 올려졌던 떡은 아무리 먹어도 체하지 않는 ‘복떡’으로 이웃과 친척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한편 액막이로 떡을 해먹는 풍속도 있었다. 이 풍속은 농촌이나 우리나라의 옛날 변소는 깊고 컸으므로 어린아이가 변소에 빠지는 경우가 흔히 있었는데, 변소에 떨어졌던 아이는 결국 죽게 된다는 속신에서 비롯된 것이다. 곧 변소에 빠졌던 아이의 액운을 면하게 하기 위하여 ‘똥떡’을 만들어 먹었던 것이다.

똥떡이라는 이름은 아름답지 못하지만, 변소 귀신을 위해 쌀가루로 만든 쌀떡이었다. 대개 송편만큼씩 동그랗게 100개 정도를 만들어, 변을 당한 아이가 들고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나누어 주었다.

이때 이 아이는 “똥떡 똥떡” 하고 외치며 이웃사람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어야만 비로소 그 액운을 면하게 된다고 한다. 떡에 관한 풍속은 또 있다. 그것은 농사가 시작되는 2월 초하루를 ‘노비일’로 정하여, 이 날 송편을 만들어서 노비들의 나이 수대로 먹였던 풍속이다.

이러한 풍속은 영동군 양산면 호탄리에서 지금도 2월 초하루를 노다리 곧 노는 날이 마지막 간다고 떡을 해서 나누어 먹는 풍속이 행해지고 있어 그 잔재를 엿볼 수 있다.

이 밖에도 떡으로 점을 치는 풍속이 있다. 떡점은 정월 대보름날 한 마을의 여러 사람들이 각각 쌀을 가지고 와 모두 합해서 가루를 만든 다음, 각자의 몫을 얻어 떡가루 밑에 자기의 이름을 적은 종이를 깔고 한 시루에 쪄 떡이 쪄진 됨됨이로 신수를 점치던 풍속이다.

이때에 자기의 떡이 설면 불길하고 잘 익으면 길하다 하였다. 떡이 설어서 불길한 사람은 떡을 먹지 말고 삼거리나 오거리 복판에다 버리면 액을 면할 수 있다고 전한다. 제주도에서는 이것을 ‘모돔떡점’이라고 한다.

떡으로 점을 치는 풍속은 팔월 한가위 날에도 있었다. 이날은 대개 송편을 빚었는데, 빚어진 송편의 모양새를 놓고 처녀들은 미래의 낭군을, 임산부들은 장차 태어날 아기의 모습을 각각 점쳤던 것이다. 임신한 부인들은 또 송편을 씹어 보아 속이 익었느냐 덜 익었느냐에 따라 태아의 성별을 점쳐보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한국식품사연구』(윤서석, 신광출판사, 1974)
『고려이전한국식생활사연구』(이성우, 향문사, 1978)
『한국식생활풍속』(강인희·이경복, 삼영사, 1983)
『조선왕조궁중연회음식의 분석적연구』(이효지, 수학사,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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