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전라북도 유형문화재(현, 전북특별자치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6종 57점. 장태수의 본관은 인동(仁同)이며, 자는 성안(聖安)이다. 1841년(헌종 7)에 금구군(金構郡) 서두면(西頭面) 상신리(上新里)에서 태어났다.
1861년(철종 12) 21세때 식년 문과에 급제하고, 승문원(承文院) 부정자(副正字)를 시작으로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1907년 고종이 순종에게 양위한 후 일본의 만행이 날로 심해지자, 이를 한탄한 끝에 고향에 돌아와 새로운 교육을 펼칠 인재를 양성할 목적으로 고향에 신명학교(新明學校)를 창설하여 배일정신을 고취하였으나, 1910년 한일 강제병합 이후 폐교되었다.
나라가 망한 뒤 일제가 그를 회유하기 위하여 은사금을 전달하자 이를 거부하였다. 마침내 일본 헌병대가 세 아들을 잡아가고 그를 체포하려 하자 1910년 음력 11월 11일에 조상의 사당에 통곡으로 고별하고 단식에 들어갔으며, 단식 중에 “고대한동포문(告大韓同胞文)”이라는 유서를 남기고 27일 만인 1910년 음력 11월 27일 향년 7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유물로는 영정(影幀), 금관(金冠), 소관(小冠), 각대(角帶), 발막(黑布), 조복(朝服: 內衣), 후수(後襚), 호패(戶牌), 홀(笏), 패도(佩刀), 원선(遠扇), 어사화(御史花), 동상(궤포함), 교지(敎旨) 35점(각 品階別), 칙지(勅旨), 칙명(勅命), 첩(帖) 등이 있다. 전북특별자치도 김제시 금구면 상신리 장방호(張方浩)가 소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