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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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봉상시(奉常寺)와 관습도감(慣習都監)에서 임시로 연주활동을 맡았던 어린 소년.
이칭
이칭
무랑(武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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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전기 봉상시(奉常寺)와 관습도감(慣習都監)에서 임시로 연주활동을 맡았던 어린 소년.
내용

원래 이조에 소속되었던 20세 미만의 소년들이었으며, 서반(西班)에 들었던 이들은 모두 양인 출신이었다.

임무는 제례의식 때 등가(登歌)의 노래와 문무(文舞)를 담당하였는데, 이 점이 무무(武舞)를 맡았던 무공의 임무와 구분되었다.

세종 이전 봉상시와 관습도감 소속의 재랑은 300인이었으나, 1431년(세종 13) 350인, 1457년(세조 3) 380인으로 각각 증원되었다가 1458년에 260인으로 감원되었다. 관습도감에 속하였던 이들의 명칭이 세종 때 무랑(武郎)으로 바뀌어진 바 있다.

그 뒤 재랑의 임무와 신분은 장악원(掌樂院)의 좌방 소속 악생에게 전승되었다. 이들은 음률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으며, 이들의 음악적 훈련은 악학(樂學)이 담당하고 있었다.

참고문헌

『세조실록(世祖實錄)』
『태조실록(太祖實錄)』
『악장등록연구』(송방송, 영남대학교민족문화연구소, 1980)
『한국음악논총』(이혜구, 수문당,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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