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대청(廣大廳)·장악청(掌樂廳)·신청(神廳)·풍류방(風流房)·공인청(工人廳)이라고도 하였다. 한말 재인청은 경기도·충청도·전라도의 각 군(郡)에 두었는데, 경기도의 재인청은 수원군 성호면 부산리에 있었다.
삼도(三道)의 각 군 소재 재인청의 우두머리는 청수(廳首)라고 불렀는데, 이들은 각 도 재인청의 총수였던 대방(大房)의 아래 두었던 각 도의 책임자인 도산주(都山主)로부터 행정적인 지시를 받았다. 어느 지방의 재인청에 매였던 광대나 재인들의 행정적인 업무는 청수가 거느린 공원(公員)과 장무(掌務)에 의하여 처리되었다.
한말 재인청이 관장하였던 주된 임무는 무당들의 반주음악을 담당하던 무부(巫夫)들의 무속음악뿐 아니라 그 당시 백성들을 상대로 펼쳤던 재인이나 광대들의 오락적 연예활동을 행정적으로 다스렸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재인청의 전통은 일제시대를 거쳐 신청이라는 명칭으로 현재까지 전라도지방에 전승되고 있으며, 그런 전통의 일부가 일제시대 서울 노량진에 있었던 풍류방에서 전승되었다.
일제 때 노량진 풍류방의 인원은 남자 해금잡이인 전악(典樂), 장구잡이인 계대(啓對), 여자 징잡이인 자비(自備)로 구성되었는데, 이들은 모두 무업(巫業)에 종사하였다고 한다.
일제 때 전라도의 신청은 장흥·나주·우수영·진도·완도에 있었는데, 그 당시의 신청은 함경도의 사무청(師巫廳)이나 제주도의 신방청(神房廳)처럼 무부들의 친목과 장학(掌學)을 맡았다고 한다.
그 당시 재인청에서는 무부의 자녀들에게 노래와 춤을 가르쳤고, 또 젓대·피리·장구·해금 등 악기잡이들의 기예연마를 하였다고 한다. 요즈음은 무부들이 계를 조직하여 친목을 위한 집합장소로 신청을 사용한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현재 장흥의 신청에 전하는 장악청중건기에 의하면 재인청은 1832년(순조 32)에 장악청이라고 불렸음을 알 수 있고, 또 장악청의 전통이 오늘날 신청에 전승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