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천 전곡리 유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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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천 전곡리 유적
연천 전곡리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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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연천군 전곡읍에 있는 석기시대 구석기의 주먹도끼 · 긁개 · 석핵 등이 출토된 생활유적. 사적.
정의
경기도 연천군 전곡읍에 있는 석기시대 구석기의 주먹도끼 · 긁개 · 석핵 등이 출토된 생활유적. 사적.
개설

1979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지정면적 778,296㎢. 1978년에 당시 동두천 주둔 미군인 보웬(Bowen, G.)에 의해 처음으로 발견되었고, 1978년에서 1983년까지 6차례, 1986년에 한 차례의 발굴 조사가 있었다.

중부 충적세 후기에 형성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이 유적은 현재 전곡읍 남쪽 한탄강이 감싸고 도는 현무암대지 위에 분포해 있다. 전곡읍에서 한탄강 유원지를 연결하는 도로의 양편으로 북서쪽에 제1지구, 남쪽으로 서편이 제2지구, 동편이 제3지구이다. 제4지구는 제1지구의 강 건너편 대지 위에 분포해 있다. 지도상의 위치는 동경 127°03′, 북위 38°01′에 해당된다. 현재까지의 발굴은 모두 제2지구에서 실시되었다.

내용
  1. 지질 및 연대

전곡리 일대는 추가령지구대의 서남부에 위치해 있다. 이 지역은 경기변성암류인 편마암과 화강암이 선캠브리아기에 형성되어 지질의 기저를 이루고 있다. 전곡리의 동북편으로 연천과 철원 사이의 지역에는 중생대동안 형성된 것으로 보이는 응회암·현무암·역암 등이 형성되어 있다. 동남편으로는 대보거정화강암류가 중생대 쥐라기에 분출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곡리 일원을 포함한 한탄강 연안지역에는 신생대 제4기에 분출된 현무암이 분포하고 있다. 이 현무암은 철원·평강지역에 산재하는 소분화구로부터 급격하지 않은 분류(噴流)의 양상으로 흘러 고기(古期) 한탄강·임진강을 따라 하류인 문산까지 진출해 있다. 용암류층은 상류에서 6매, 하류인 문산에서 1매가 보이며, 유적이 있는 전곡리에서는 2매가 관찰되고 있다.

전곡리의 2매는 포타슘·아르곤 연대측정결과, 하부의 것은 대략 60만년 전후, 상부의 것은 30만년 전후에 분류된 것이라는 것이 알려졌다. 이 현무암층들을 전곡 현무암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브루네스 정지자기기(正地磁氣期)에 해당되고 있다.

전곡 현무암 분출 전의 고기 한탄강의 퇴적은 현재의 한탄강을 따라서 현무암 아래에 미고결의 사력층으로 나타나 백의리층으로 부르고 있다. 현재의 한탄강은 원래 현무암 분출 후 넓게 형성된 하상 위를 한동안 흐르면서 하상의 바닥을 이루고 있던 현무암을 침식해 결국 오늘날의 한탄강으로 안정하게 되었다.

전곡 현무암은 냉각시 수축의 차이로 인해 발달하게 된 주상절리 등의 구조로 균열이 있어서, 서리작용과 집중호우의 기후현상이 특징인 한반도 중부지방에서 짧은 기간동안 침식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현무암대지 위에 존재하는 구석기 포함의 퇴적물은 한탄강이 대지 위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던 기간 동안에 형성된 것이다.

빠른 속도의 현무암침식과 현무암이 30만년 전경에 분출된 것으로 본다면, 대지 위의 구석기 포함층의 형성연대는 적어도 20만년 전후 이하로 내려오지 않을 것이다. 이는 전곡리 유적의 적색점토가 18∼21만 년 전 사이에 형성된 것으로 보는 중국 뤄촨(洛川) 뢰스층의 적색토대와 연결될 수 있는 점으로도 뒷받침된다. 이러한 연대관과는 별도로 퇴적층의 발열형광법(thermolumines-cence dating method)에 의해 얻어진 약 4만 5000B.P.를 유적의 연대로 보는 견해도 있다.

  1. 퇴적층

퇴적층은 지점에 따라 1m 미만의 깊이에서 6∼8m 내외의 깊이까지 드러나고 있다. 제2지구의 발굴에서는, 동편 언덕에서 점토층으로만 이루어진 퇴적층이 있고, 서편의 강쪽 능선에서는 두터운 굵은 모래층이 점토층 아래에 드러나고 있다. 이 모래층은 다시 미세사층을 덮고 있다.

이 회색 또는 황색의 미세사층은 제2지구 서편에 버려진 유로(流路)에 형성된 우각형호가 존재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모래퇴적은 당시 이 지역의 유로가 활동적이었음을 반영하고 있다. 일부 사질층에서는 유물집중층이 드러나고 있으며 이는 유수에 의해 재퇴적된 것으로 판단된다. 점토퇴적물은 유수에 의해서라기보다는 범람원 퇴적으로 보이는데 유물의 집중이 산발적으로 관찰되고 있다.

한탄강이 현무암대지 위에서 퇴적층을 형성하고 있는 동안 단속적으로 고인류가 출현해 사냥과 채집을 하는 구석기 유적이 형성되었을 것이다. 퇴적층 속의 유물은 일부 지질학적인 변동으로 재퇴적되었거나 퇴적시에 지표수 그리고 지중에서 벌레와 식물뿌리 등 생물학적인 요인에 의해서 변형되어 현재 고인류의 직접적인 행위파악이 가능한 생활면은 보이지 않고 있다.

  1. 유물

7차에 걸친 발굴에서 3,000점 이상의 석기가 출토되었고 이보다 많은 수가 지표에서 채집되었다. 석기는 주로 석영맥암과 규암을 이용한 것이 거의 대부분이며 이 외에 현무암·편마암·운모편암도 소량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재료들은 거의 모두 당시의 하상에 존재하던 강자갈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1m 정도 크기의 냇돌도 있다.

가장 특징적인 석기는 아슐리안형의 주먹도끼(hand-axe)들로 양면가공된 것과 외면가공된 것이 있다. 평면이 타원형인 것과 첨두형인 것이 모두 있으며 이들 중 일부는 몸통이 두텁고 큼직한 박편흔으로 덮여 있어서 아프리카의 상고안(Sangoan) 석기공작과 지형적 유사성이 있음이 지적되고 있다.

주먹도끼 외에도 가로날도끼와 뾰족끝찍개(pick) 등의 대형 석기가 존재하고 있다. 찍개(chopper)는 양면가공과 외면가공의 것들이 있는데 대부분 냇돌 또는 냇돌조각으로 만들었다. 다각면원구는 상당히 구에 가까운 것에서부터 불규칙다면체까지 여러 가지 모양이 있는데 대부분 한쪽 면에서 삼면까지 자연면이 남아 있는 것이 특징이다.

소형 석기로는 긁개가 주류를 이루고 소량의 첨두기와 홈날석기 등이 채집되었다. 긁개는 직선날·볼록날·오목날 등의 형식이 보인다. 몸통이 두툼하고 급경사인 볼록날의 긁개가 보다 정형화한 형식이다. 일반적으로 소형 석기들은 집중가공된 것이 적어서 제작상의 별다른 특징이 보이지 않는다.

석핵은 2, 3매의 박편을 떼어낸 변형된 냇돌 또는 즉시석핵(casual core)에서부터 보다 정형화한 반원추형 석핵에까지 다양하다. 즉시석핵류가 정형화한 형태의 것들보다도 훨씬 많다. 다량의 박편을 떼어낸 경우라 하더라도 일정 타격면을 반복 또는 규칙적으로 사용하기보다는 불규칙하게 박편제작한 경우가 훨씬 많다. 박편제작이나 가공에는 직접타격법(돌망치를 사용한)이 주로 사용되었다. 주먹도끼 또는 가로날도끼 등의 대형 석기제작을 위한 대형 박편의 제작에는 대석법도 사용되었다.

박편은 대부분 천석의 자연면 평면이나 박리흔 평면을 이용해 떼어냈으며 소수의 다각모서리 타격면(facetted striking platform)이 보이나 조정타격법으로 볼 수는 없다. 많은 수의 박편이 배면(dorsal face)에 자연면이 남아 있고, 박리각이 100∼105°와 110∼115° 두 범위에 집중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동일한 타격면을 2차까지만 사용할 수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발굴에서 채집된 석기 중 다듬은 석기는 대체로 5∼15% 내외이다. 약간의 석핵과 박편이 존재하고 대형 또는 소형의 석편과 부스러기가 많은 수(80% 내외)를 차지하고 있으며 소량의 자연천석도 존재한다.

주먹도끼 등 양식적으로 발달한 석기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기법으로는 비정형과 즉시성의 석기양태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는 석재의 제약성과 함께 한반도를 포함한 동북아시아 온대환경의 적응과정에서 이루어진 결과로 보인다.

의의와 평가

전곡리에서 발견된 아슐리안형 석기들은 1970년대 말까지 이러한 석기의 존재유무로 동아시아와 아프리카·유럽으로 구석기문화를 2분하던 모비우스의 학설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증거이다. 이로써 세계 구석기학계의 고인류의 문화적인 발전과정에 대한 이해에 새로운 면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동아시아에서도 구석기공작에 대해 새로운 각도에서 이해하려는 시도들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한반도 내에서는 빈약한 전기 구석기공작 이해에 풍부하고도 획기적인 자료가 되었을 뿐 아니라 중부 홍적세동안 고인류의 서식양상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였다.

전곡리 유적조사를 계기로 한탄강·임진강 유역에 대한 4기 지질학적인 연구가 이루어졌다. 이를 토대로 유적의 형성과정에 대한 고찰이 제고됨으로써 구석기연구의 방법론 발달에도 큰 기여를 하였다.

참고문헌

『전곡리-1986년도발굴조사보고서-』(서울대학교박물관, 1989)
『전곡리발굴중간보고』(정영화, 1984)
『전곡리』(김원룡 외, 문화재연구소, 1983)
「전곡리 구석기 유적의 형성과정과 문화전통이해에 있어서의 문제점」(배기동, 『김정기박사화갑기념논총』, 1990)
「전곡리 구석기문화와 동북아시아 홍적세」(배기동, 『학술원논문집』28, 1989)
「전곡리 구석기 유적의 연구」(이기길, 『고문화』27, 1985)
「전곡리출토 주목도끼류의 성격에 대하여」(배기동, 『고문화』22, 1983)
「전곡리 발굴조사」(정영화, 『고문화』23, 1983)
「전곡리 아슐리안 양면핵석기문화 예보」(김원룡·정영화, 『진단학보』46·47합병호,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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