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신라의 승려 혜통(惠通, 왕화상)이 당나라에 유학하던 중 당나라 고종(高宗)의 공주를 병들게 한 독룡(毒龍)을 쫓아내자, 이에 혜통에게 앙심을 품은 독룡은 신라에 건너와서 크게 행패를 부렸다.
이때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정공은 혜통에게 독룡의 피해가 심함을 알리어 귀국하여 해를 막아줄 것을 청하고, 혜통과 더불어 665년(문무왕 5)에 귀국하였다. 그리고 혜통이 독룡을 문잉림(文仍林)에서 쫓아냈다.
그러나 이번에는 정공이 독룡의 원한을 사게 되어, 독룡이 정공의 집 앞에서 버드나무가 되어 보복의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줄 모르는 정공은 버드나무를 매우 사랑하였는데, 692년 7월에 마침 신문왕이 죽자 장지에 이르는 길을 만들기 위하여 집앞의 버드나무를 유사(有司)에서 베려고 하였다.
그러나 독룡이 씌어서 “내 목을 벨 수는 있을지언정 이 나무는 베지 못한다.”고 왕명에 항거하다가 죄를 입어 죽임을 당하고, 집은 흙으로 파묻히게 되었으며, 처와 가속들도 죄를 받았다. 뒤에 효소왕이 혜통으로부터 그 항명이 본심이 아니라 독룡의 소행임을 듣고 알게 되어, 그 처와 가속들은 면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