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보성 출신. 이명(異名)은 기찬(基贊). 농업에 종사하다가 일제의 국권침탈에 격분해 의병에 투신했다. 1908년 2월경 안규홍(安圭洪)이 의병을 일으키자 적극 호응해 그 휘하에서 포군십장(砲軍什將)·기군장(起軍將) 등을 맡았다. 이후 보성·순천·동복(同福)·장흥 등지에서 일본군경에 항전하였다.
1908년 5월 의병의 활동을 밀고하는 보성의 일진회원을 처단하고, 양민의 재물을 탈취하는 순천의 일진회원을 제거하였다. 일제의 식민통치기구인 분파소나 재무서, 군경 숙소 등을 공격했으며, 일본군경을 비롯한 일본 농어민, 친일세력 등을 급습하였다.
주요 전투지로서는 보성의 파청(坡靑)·대원사(大原寺)·진산(眞山)·복내장(福內場)·호곡(豪谷), 그리고 동복의 운월치(雲月峙), 광양의 망덕(望德), 승주의 쌍암(雙巖) 등을 꼽을 수 있다. 특히, 연고지인 보성을 중심으로 활동했기 때문에 주민의 생존권 보호에 힘을 기울여 주민들의 열렬한 호응을 받았다. 이는 이들이 처음 의병을 일으킬 때 양반유생들이 비협조적이었던 점에 비추어 보면 상당한 변화였다.
안규홍의병부대는 전라남도의 중동부 지역에서 관리와 토호의 가혹한 수취와 일본군의 불법적 침략에 대항해 줄기찬 투쟁을 전개했는데, 정기찬은 1909년 9월 일본군의 대규모 군사작전이 전개되었을 때 붙잡혀 이듬해 교수형을 당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