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적암살단 ()

근대사
단체
1906∼1907년에 우국지사들이 이완용(李完用) · 이근택(李根澤) · 박제순(朴齊純) · 이지용(李址鎔) · 권중현(權重顯) 등 이른바 ‘을사오적(乙巳五賊)’을 처단하기 위해 결성한 단체.
내용 요약

오적암살단은 1906년∼1907년에 우국지사들이 이완용·이근택·박제순·이지용·권중현 등 이른바 ‘을사오적’을 처단하기 위해 결성한 단체이다. 조직이 여러 개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06년 군부대신 이근택의 집에 잠입하여 부상을 입힌 기산도가 속한 조직과 나인영·오기호가 주도한 자신회가 대표적인 조직이다. 5적을 처단한 다음 친일정부를 전복하고 신정부를 수립할 계획까지 세운 자신회도 주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권중현을 부상시키는 데 머물렀다. 거사 실패로 투옥되고 유배를 가기도 했지만 조직원들은 일제강점기에 민족해방운동의 중심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정의
1906∼1907년에 우국지사들이 이완용(李完用) · 이근택(李根澤) · 박제순(朴齊純) · 이지용(李址鎔) · 권중현(權重顯) 등 이른바 ‘을사오적(乙巳五賊)’을 처단하기 위해 결성한 단체.
기능과 역할

기산도는 1905년 말부터 김석항(金錫恒) · 김일제(金一濟) 등과 더불어 5적 처단의 기회를 노리다가 1906년 2월 16일 밤 군부대신을 지낸 이근택의 집에 잠입해 거사를 결행했다. 당시 친일고관들에 대한 삼엄한 경호가 이루어지고 있었으나, 이를 극복하고 거사를 성공시킨 것이었다. 이들은 재빨리 현장을 벗어났으나, 또 다른 의열투쟁에 연루되어 기산도가 체포됨으로써 사건의 진상이 세상에 알려졌다. 기산도는, “오적(五賊)을 살해하려는 사람이 어찌 나 혼자이겠느냐? 탄로난 것이 그저 한스러울 뿐이다.”라고 말하며 매국노에 대한 국민적 분노를 대변했다. 그는 김석항 등 11명과 함께 재판에 회부되어 2년형을 선고받았다. 석방된 후에도 그는 한말의병에 투신한 바 있으며, 임시정부의 군자금을 모으는 등 민족운동에 헌신했다.

1907년 3월 25일 나인영(羅寅永) 등을 중심으로 한 자신회(自新會)가 을사오적 가운데 권중현을 저격해 부상시켰다. 자신회의 행동대원 이홍래(李鴻來) · 강상원(康相元) 등이 입궐(入闕)하던 권중현을 저격했으나, 가벼운 부상을 입히는데 그쳤다. 당시 나인영을 비롯한 자신회는 5적을 모두 처단한 다음 친일정부를 전복하고서 신정부를 수립할 계획이었다. 이들은 을사5적이야말로 2000만 민족을 노예로 만들고 국권을 농단한 자들이므로 반드시 응징해야 한다는데 뜻을 모았다. 그리하여 나인영과 오기호는 5적을 처단할 계획을 수립했고, 김동필(金東弼) · 박대하(朴大夏) · 이홍래 · 이용채(李容彩) 등은 전라 · 경상도에서 의병의 모집과 무기의 구입을 맡았으며, 김인식(金寅植) 등은 거사에 필요한 경비를 조달하였다.

1907년 2월 200여 명의 회원으로 결성된 자신회는 애국가(愛國歌) · 동맹서(同盟書) · 참간장(斬奸狀) · 취지서(趣旨書) · 자현장(自現狀) · 포고문(布告文) 등을 작성해 5적 처단의 대의(大義)와 조선의 독립을 수호하기 위해 애국의 혈성(血性)으로 나섰음을 밝혔다. 1907년 2월 하순부터 이들은 5적을 처단하려 했으나 번번히 미수에 그쳤다. 1907년 3월 25일의 거사는 자신회의 네 번째 시도였다. 이들은 박제순 · 이지용 · 권중현 · 이완용 · 이하영 · 이근택을 제거하기 위해 결사대를 보내어 저격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6개조 가운데 이홍래조만이 매국노 권중현을 저격했을 뿐 나머지 조는 실패하고 말았다. 권중현의 저격에 가담한 강상원은 체포된 후 “죽고 사는 것은 처분에 맡기겠다.”며 매우 의연하게 행동했다.

일제가 연루자의 색출에 나서자 나인영 등 자신회의 간부들은 스스로 주모자임을 밝히고 결사대를 모두 석방하라고 주장했다. 나인영을 비롯한 30여 명의 관련자들은 대부분 호남 출신들이었다. 이들은 5∼10년 유배형을 선고받아 정배(定配)되었으나, 1907년 12월의 특사(特赦)로 석방되었다. 그 뒤 나인영과 오기호 등은 대종교를 창시해 민족의식을 북돋우고 독립운동의 사상적 기반을 제공했다. 또한 서정희 등은 광주지역 3 · 1운동과 일제하 농민운동의 중심인물로 활약한 바 있다. 이 밖에도 5적을 암살하려는 시도는 끊임없이 이어졌으나, 주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의의와 평가

오적암살단의 활동은 친일세력을 두려움에 떨게 했으며, 민족의 기개가 살아있음을 내외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계몽운동과 의병운동 계열의 연합한 형태로 투쟁을 전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나아가 이들은 일제하 민족해방운동의 중심세력으로 성장했다는 점에서 더욱 큰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참고문헌

『고종실록(高宗實錄)』
『대한계년사(大韓季年史)』
『만주한인민족운동사연구(滿洲韓人民族運動史硏究)』(박환, 일주각,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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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철(羅喆)의 인물(人物)과 사상(思想)」(박환, 『동아연구』 17, 서강대 동아연구소, 1989)
「해제(解題) 한말(韓末) ‘자신회(自新會)’의 ‘취지서(趣旨書)’·‘동맹서(同盟書)’ 등」(신용하, 『한국학보(韓國學報)』 13, 일지사, 1978)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황성신문(皇城新聞)』
『구한국관보(舊韓國官報)』
집필자
홍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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