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말기 민영환(閔泳煥)의 심복으로 총순(摠巡)으로 복무하다가 1905년 민영환이 순국한 뒤 사직하였다. 그 뒤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의병규합에 노력하였다.
1907년 나인영(羅寅永)·오기호(吳基鎬) 등이 을사조약에 찬동한 매국 5적을 암살하려는 계획을 수립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들과 연락하여 매국 5적 암살계획에 동참하였다. 두 차례에 걸쳐 계획을 추진하였지만 모두 실패하였다.
이에 계획을 수정하여 동지들 각자가 5적을 맡아 암살하기로 하였다. 자신은 군부대신 권중현(權重顯)을 암살하기로 하고, 강원상(康元相)과 함께 사동(寺洞)에서 기다렸다가 권중현이 탄 인력거를 습격하였으나 호위 일본 군인의 반격으로 실패하였다.
그 뒤 만주로 망명하여 1910년 동학당(東學黨)을 조직하였고, 1918년 정신(鄭信)외 1명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하는 등 계속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3·1운동 이후 대종교도가 중심이 되어 조직한 정의단(正義團)에 가입하여 기관지 『일민보(一民報)』를 간행하며 항일의식을 고취하였다.
이 해 8월 김좌진(金佐鎭)이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를 조직하자 이에 가입하여 모연국장(募捐局長)으로 만주와 국내에서 군자금 모금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1923년 김승학(金承學)·이유필(李裕弼)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참의부(參議府)에 가담하였다.
만주교포를 학대하는 하얼빈의 일본영사관원과 형사부장을 살해하기 위해 하얼빈에 잠입하였다가 일본 경찰에 잡혀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