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3년(태조 2) 정도전(鄭道傳)이 지은 송도가(頌禱歌). 전 5장. 각 장 3행. ≪태조실록≫ 권4의 태조 2년 7월조와 ≪세종실록≫·≪악학궤범≫·≪악장가사≫ 등에 전하며, ≪삼봉집 三峯集≫에는 한시만 실려 있고, ≪대악후보 大樂後譜≫에는 악보만이 전한다. <납씨가 納氏歌>·<궁수분곡 窮獸奔曲> 등과 더불어 태조의 무공(武功)과 조선의 건국을 송축하기 위해 지은 노래이며, 그 뒤에 악장으로 사용되었다.
이 작품은 1388년(우왕 14)에 우왕이 요동을 치기 위하여 군사를 일으키자 이성계(李成桂)가 사불가론(四不可論)을 내세워 회군하니, 동북면의 백성들과 여진족들이 기뻐하여 주야로 몰려와 칭송했다는 내용의 노래이다. 형식은 6언시체(六言詩體)의 한시에 토를 단 형태이며, 제2행의 끝에만 우리말 토가 붙어 있고, 제3행은 ‘偉(爲)東王盛德’이라는 후렴으로 되어 있다.
6언한시가 ‘3·3’으로 율독될 수 있기 때문에 제1·2행을 한 행으로 보고 ‘3·3·3·3·4(3)’와 같은 음수율로 그 형식을 파악하여 경기체가의 파격처럼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정동방곡>이 음악적으로 고려가요 <서경별곡>과 같은 점과 한시의 형식을 참고할 때 각 장은 3행(후렴을 제외하면 2행)으로 파악해야 한다.
≪삼봉집≫에는 한시로만 전하는 데 비하여 ≪악장가사≫ 등의 가요집에 현토체로 실려 있는 것은 <서경별곡>의 형식에 맞추어 부르려고 의도적으로 우리말을 덧붙인 것이다. 특히, ≪삼봉집≫에는 후렴이 ‘爲東王盛德多里利’로 되어 있는데, 이 ‘多里利’는 <서경별곡>의 후렴 ‘다링디리’와 비슷하여 <정동방곡>이 <서경별곡>과 관계가 있음을 명백히 해준다. <金文基>
이 곡은 ≪대악후보≫에 의하면 ‘3·2·3·3·2·3’의 16정간(井間) 6대강(大綱)에 6행강(行綱)으로 되어 있고, 장구와 박(拍)을 위한 악보와 함께 총보(總譜)로 되어 있다. 악조(樂調)는 평조이며, 음악은 ≪시용향악보 時用鄕樂譜≫의 <서경별곡> 8행강 중 제5행강까지는 같고, 제6행강은 종지법을 바꾼 것이다.
이 곡은 태조와 신의왕후(神懿王后)의 혼을 모신 사당인 문소전(文昭殿)에서 제사를 지낼 때와 경칩일·상강일(霜降日)에 둑제(纛祭 : 軍中의 큰 旗인 纛을 모신 纛神廟에서 지내는 제사)를 지낼 때 아헌(亞獻)·종헌(終獻)·철변두(徹籩豆:祭禮에서 제사지낸 그릇들을 덮는 일) 절차에서 연주되었다.
세종 때는 설이나 동짓날에 문무백관이 모여 왕에게 절한 뒤 베푸는 잔치인 회례연(會禮宴)에서 사용되기도 했는데, 같은 내용이 <용비어천가> 제9·10장에 실려 있다. 성종 때는 향악(鄕樂)과 당악(唐樂)을 위한 악공취재(樂工取才)의 시험곡으로도 쓰였다. 현재는 당피리를 중심으로 한 관현악곡으로서 노래말 없이 순 기악곡으로 연주되고 있다.
조선 초기의 악가(樂歌)와 고려의 속악(俗樂)과의 관계를 알려 주는 귀중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