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관등은 아찬(阿飡)이었고, 관직은 완산주주조(完山州州助)였다. 822년(헌덕왕 14) 3월 웅천주도독(熊川州都督) 김헌창(金憲昌)이 반란을 도모하면서 여러 주군들의 관리에게 협조를 요청하는 한편으로 협박도 하였다. 완산주에서는 이를 거절하는 한편으로, 3월 18일 몰래 완산주의 장사(長史) 최웅(崔雄)과 정련의 아들 영충(令忠)을 서울로 보내 변란을 알렸다. 그 공로로 최웅은 급찬(級飡)의 관등과 속함군태수(速含郡太守)에 임명되었고, 영충은 급찬의 관등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