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나주(羅州). 호는 불휘(不輝). 아버지는 진규(珍奎)이다. 전라남도 나주 출생. 3·4·6대 3선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1910년 2월 12일 전남 나주에서 중농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광주고보 4학년에 재학 중이던 1929년 광주학생의거에 참여하였다. 1931년 광주고보 졸업 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주오대(中央大) 전문부에 입학하여 1938년에 본과 법학부를 졸업하였고, 1944년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1945년 초까지 대학원에서 근무하였다. 해방직후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하여 나주군 위원장을 역임하였지만 좌익의 주도하에 인민위원회로 재편되는 데 반대하여 탈퇴하였다. 1945년 12월 미군정의 식량공출에 반발하여 해남폭동이 일어나자 그 수습을 위촉받아 해남군수가 되었다. 이후부터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인 1949년 초까지 화순·영광·장흥군수 등을 역임하면서 민생안정과 혼란수습에 기여하였다.
1950년 협화무역공사 부사장, 1952년 전남도교육위원회 부의장, 1952년 호남신문사 취체역, 1952년 대한축산동업조합중앙연합회 최고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1954년 자유당에 입당하여 전남도당 부위원장에 피선되었으며, 같은 해에 제3대 민의원선거에서 자유당 공천으로 나주을구에서 당선되었고, 1958년의 선거에서도 같은 지역에서 재선되었다.
1954년에서 1958년에 걸쳐 국회헌법위원회 위원을 지내고, 1955년 자유당 정책위 의장을 거쳐 대한탁구협회 회장이 되었으며, 이듬해 세계탁구연맹 이사, 아세아탁구연맹 부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1957년 국회 교통체신위원장을 지냈고, 이해 대한연탄주식회사사장에 취임하였으며, 1958년에 대한연탄공업협회 회장에 피선되었다.
1960년 3·15정부통령선거 시에는 전남도당 위원장으로 있었지만, 부정선거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1960년 4·19혁명 이후에 실시된 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출마하여 낙선하였다.
이듬해 일어난 5·16군사정변 후에는 혁명 주체세력이 주도하여 창당한 민주공화당으로부터 입당교섭이 있었으나 참여하지 않았고, 1963년 김준연(金俊淵)·김도연(金度演)·서민호(徐珉濠) 등과 함께 자유민주당을 창당하여 중앙위원이 되었으며, 같은 해 실시된 6대 선거에 자유민주당 후보로 당선되었다.
6대 국회 개원 후 민정·민주·자민당 등 야권 3당이 삼민회라는 이름으로 단일의 원내 교섭단체를 구성할 때 원내총무가 되었다. 1965년에 민중당으로 옮겨 당무위원이 되었고, 1967년 7대 선거에서는 민중당 후보로 출마하였지만 공화당의 부정선거로 인하여 낙선하였다.
선거무효 투쟁 끝의 2년 만인 1969년에 법원에서 재선거판결을 받았으나, 공화당과 민중당의 여야 간의 대결로 진행된 재선거에서 낙선하였다. 이후 정계에 관여하지 않았다. 1963년에 육림사업의 기업화 필요성을 주장하면서 호남육림을 세워 사장으로 재임하였고, 1982년 의원동우회 부회장, 1991년 헌정회 원로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1997년 2월 25일 별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