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민족주의는 단군의 고조선 건국을 민족의 출발점으로 보고 단군 자손이라는 정체성에 기초하여 민족적 결속과 자주독립 및 발전을 도모하려는 종교운동이자 정치사상이다. 『삼국유사』와 『제왕운기』에서 단군의 건국 과정을 수록하고, 고대국가들을 단군의 후계로 서술하였다. 세종 때(1492) 단군사당을 세움으로써 동국역사의 시조, 또는 국조로서의 위상을 드러냈다. 단군의 자손 의식 확산, 단기연호 사용, 개천절 지정, 마니산 성화 채화 의식 등은 단군민족주의와 관련되어 있다. 단군민족주의는 민족의 정체성과 단결을 고취하는 핵심 기제로 민족의식의 구심점이 되었다.
단군민족주의가 대중화하기 시작한 시점은 한말 애국계몽운동기이지만, 그러나 그같은 인식은 한국사 속에서 그 뿌리가 매우 깊다. 단군민족주의적 인식이 표명된 가장 오래된 문헌은 13세기에 쓰여진 『삼국유사』나 『제왕운기』이다.
이들 사서는 『위서』와 『고기』 · 『본기』 같은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자료를 인용하여 단군의 건국과정을 동국역사의 첫머리에 수록하고 있는데, 특히 『제왕운기』에서는 고구려 · 백제 · 신라 · 부여 · 예맥 등 고대국가들 모두를 단군의 후계로 서술하고 있다.
고려말 · 조선초에는 단군민족주의 의식이 상당히 고조된다. 조선초부터 논의되던 단군에 대한 국가적 제사 문제는 세종 때(1492) 와서 독립된 단군사당을 세움으로써 진전을 이루었으며, 동국역사의 시조 또는 국조로의 단군의 위상이 더욱 선명해지게 된다.
조선조를 통하여 단군은 ‘東方始受命之主(동방시수명지주)’ · ‘東方始祖(동방시조)’ · ‘朝鮮始祖(조선시조)’ · ‘東方生民之鼻祖(동방생민지비조)’ 등으로 지칭되었으며, 점차 국조를 넘어 민족적 시조라는 차원으로까지 인식이 심화되어 갔다. 물론 사대모화사상이 강하던 중세기를 통해서는 기자에 대한 숭배가 강화되면서 단군은 상대적으로 소외되어 있었다 할 것이다.
그러나 조선후기에 들어 유교와 왕조권력이 약화되면서 단군이 다시 떠오름을 본다. 특히 안팎의 위기를 타개할 수 있는 새로운 정치공동체와 집단정체성에 대한 요구가 커지면서 단군민족주의가 대중화하게 된다.
단군의 자손의식이 대중적으로 확산되고, 단군의 건국으로부터 시간을 기록하는 단기연호가 사용되었으며, 단군의 탄강과 건국을 기념하는 개천절이 기념되기 시작하였다. 나철을 중심으로 하여 단군을 국조이자 천신(天神)으로 신앙하는 단군교( 대종교)운동도 활발히 전개되었고, 신채호의 주도하에 단군에서 시작된 조선민족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학술적 연구도 본격화하였다. 민족사를 ‘반만년 역사’로 표현하는 관행과 백두산을 민족적 성산으로 인식하는 전통도 확산되어 갔다. 민족언론과 각종 계몽운동현장에서 단군이 가르쳐졌다.
단군민족주의는 소중화 의식과 ‘오백년유민(五百年遺民)’ 의식, 그리고 일제가 강요하던 내선일체론을 극복하고, 조선민족의 정체성과 단결을 고취하는 핵심기제로 자리잡아 갔다. 삼일운동 때의 독립선언문들이 선언일을 단기로 표기하고 독립의 주체를 단군의 자손 배달겨레로 설정한 것은 단군민족주의가 대중화되어 민족의식의 구심점이 되어있음을 확인시켜 주는 대목이다. 한민족은 단군민족주의를 매개로 하여 전근대민족으로부터 근대적 민족으로 진화하였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일제기를 통해서는 단군민족주의가 억압되었었다. 그러나 해방이 되자 다시 대중적으로 부활하였으며, 대한민국정부에 의해 국가의 제도의례속에 자리잡기에 이른다. 그 대표적인 것이 단기연호를 국가의 공용연호로 법제화한 것과, 개천절을 국경일로 정한 것, 그리고 홍익인간을 교육의 기본이념으로 정한 것 등이다.
전국체전 때 성화를 마니산에서 채화하는 관례가 정립된 것이나, 국사교육에서 단군의 건국이 적극적으로 가르쳐진 것, 그리고 단군 영정이 정부차원에서 지정된 것 등도 단군민족주의가 남긴 자취들이다. 단군민족주의의 이같은 제도화는 민족적 정체성과 자긍심을 강화하고 국민통합과 민족통일을 위한 의지를 고취하자는 데 취지가 있었다 할 수 있다.
단군민족주의와 관련해서는 적지않은 논쟁이 존재한다. 그들 논쟁은 고조선 건국의 실재성과 국사교육에의 반영 방법, 단군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방안 등을 둘러싸고 전개된다. 1970년대 이후 전개되었던 ‘국사찾기’ 논쟁과, 단군성전이나 단군상 등 기념물 건립을 둘러싼 논쟁, 단기연호 부활을 둘러싼 논쟁 등은 단군민족주의를 둘러싸고 발생한 사회적 대립의 대표적인 것들이다.
북한은 단군민족주의에 대해 비판적이었지만, 1993년 사회과학원 명의로 단군릉에서 단군의 유골이 발견되었다는 발굴보고를 내놓은 이후 입장이 바뀌었다. 단군릉을 대대적으로 개건하기도 했고, 단군민족 단결론을 자주 제기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의 이같은 동향에 대해서는 그 의도의 진정성과 관련하여 비판이 제기되기도 한다.
한국사 속의 단군민족주의는 단순히 단군의 자손으로의 민족정체성 인식을 고취하는데 그치지 않고, 한국사를 민족과 공동체, 자주독립과 통일, 민주주의와 평등, 정의와 복지의 방향으로 진전시켜온 동력이기도 하였다. 특히 일제와 맞서 싸우는 저항민족주의의 에너지를 형성하고, 민족적 화합과 통일로 나아가게 하였다.
통일민족국가를 향한 사상적 대안을 모색하는 데도 관여하였는데, 조소앙이 제시한 삼균주의나 안재홍이 제시한 신민족주의 정치이론 같은 것은 단군민족주의적 정치이론이라는 의의를 가진다. 단기연호는 1962년 폐기되어 서기로 교체되었지만, 개천절 국경일과 홍익인간 교육이념은 아직도 국민적 통합기제의 하나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