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사호

  • 역사
  • 인물
  • 조선 전기
  • 조선 후기
조선 후기에, 지의금부사, 경기도관찰사, 형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 몽여(夢輿)
  • 시호충민(忠敏)
  • 화곡(禾谷)
인물/전통 인물
  • 본관광주(光州)
  • 사망 연도1616년(광해군 8)
  • 성별남성
  • 주요 관직형조판서
  • 출생 연도1553년(명종 8)
집필 및 수정
  • 집필 1995년
  • 이희권 (전북대학교, 한국사)
  • 최종수정 2023년 02월 0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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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후기에, 지의금부사, 경기도관찰사, 형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몽여(夢輿), 호는 화곡(禾谷). 정순인(鄭純仁)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경(鄭褧)이고, 아버지는 장령 정이주(鄭以周)이며, 어머니는 봉원부원군(蓬原府院君)정창손(鄭昌孫)의 5대손으로 부사과 정응서(鄭應瑞)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73년(선조 6) 사마시에 합격하고, 1577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주서로 있었으나 1582년 경망(輕妄)하다는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1586년 안동부사가 되었고, 1599년 호조참의로 구관당상(句管堂上)을 겸직하였다.

대사헌으로 진하사은사(進賀謝恩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 이조참의·동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1607년 황해도관찰사가 되었으나 정철(鄭澈)의 아들 종명(宗溟)을 안성군수로 삼은 책임을 지고 파직되었다. 그러나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병조참판에 복직되었다.

곧 이조참판에 올라 동지춘추관사가 되어 『선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 뒤 한성부우윤을 거쳐 1611년(광해군 3) 대사헌·지의금부사를 지냈으며, 1612년 평안도관찰사가 되었으나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

이듬해 서인으로서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김제남(金悌男)의 역모에 관련하였다는 혐의를 받았으나 죄가 없어 경기도관찰사·형조판서 등을 지냈다. 일찍이 임진왜란 때 군량을 관장하여 보급에 힘썼으며, 소를 올려 정인홍(鄭仁弘)·이이첨(李爾瞻) 등을 논책하였다.

글씨를 잘 썼으며, 작품으로는 「연성대첩비(延城大捷碑)」가 있다. 청주 수락서원(壽樂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민(忠敏)이다.

참고문헌

  • - 『선조실록(宣祖實錄)』

  •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 『국조방목(國朝榜目)』

  • -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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