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낙언(樂彦), 호는 일광(一狂). 전라도 고창 출신. 아버지는 정종택(鄭鍾澤)이며, 어머니는 거창신씨(居昌愼氏)이다. 기우만(奇宇萬)과 최익현(崔益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905년 말 시묘(侍墓)를 마치고 하산하자, 을사조약으로 국권이 일본에 넘어간 것을 개탄하고 최익현을 찾아갔다. 당시 토적소(討賊疏)를 올리다 지친 최익현은 정시해에게 영남지방의 지사를 규합하여 의병 봉기를 준비하도록 하였다.
경상도 일대를 누비며 동지 규합을 위해 동분서주하면서 나라를 잃은 미친 백성이란 뜻으로 실국광민(失國狂民)이라 자칭하고, 일광이라 자호(自號)하였다.
1906년 봄 태인으로 최익현을 찾아가 영남의 민심 동향과 지사들의 반응을 보고하고 거의모사(擧義謀事)에 참여하였다. 영남과 호남의 의병이 함께 봉기할 것을 통고하기 위해 다시 영남으로 떠나 19일 만에 임무를 마치고 돌아왔다.
최익현의 의거 소식을 듣고 모여든 지사와 포수(砲手)는 날로 늘어나, 지방관아의 무기를 접수하고 군량을 확보해 의병대의 병력은 800여 명에 이르렀다. 6월 5일 최익현 의병대의 소모장 겸 중군장(召募將兼中軍將)으로 태인을 출발하였다.
6월 6일에는 순창 구암사(龜巖寺)로 진을 옮기고, 이튿날 순창성 밖에서 일본군 10여 명을 사살하고 전열을 정비하여 6월 8일에는 곡성으로 진출하였다.
6월 10일 순창으로 회군해 포진 중, 6월 11일 일본군과 합세한 전주 · 남원의 진위대(鎭衛隊)와 충돌하다가 전사하였다.
1963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