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국가민속문화재(현, 국가민속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정온은 조선 중기의 문신인데, 후손들이 그의 생가를 1820년에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솟을대문의 대문간채를 들어서면 남향한 사랑채가 있다. ㄱ자형 평면이며 정면 6칸, 측면은 전퇴(前退) 있는 2칸 반이고, ㄱ자로 꺾여나온 내루(內樓)부분이 1칸 반 규모이다.
이 건물의 주목되는 점은 두줄박이 겹집이며 전퇴를 두었다는 것과 내루에 눈썹지붕이 따로 설치되어 있다는 점이다. 안채로 들어가려면 사랑채 왼쪽의 중문을 통하도록 되어 있으며 중문채는 3칸이다.
중문을 들어서면 네모 반듯한 내정(內庭)인데 사랑채와 안채 사이의 내정 좌우로 각각 부속건물이 있다. 왼쪽에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큼직한 곡간(穀間)이 있다. 중방(中枋) 아래에 판벽(板壁)을 들인 이 곡간 뒤편에 내측(內厠)이 있다.
마당 오른쪽에는 서향한 뜰 아래채가 있는데 마루와 방으로 구성된 외줄박이 4칸집이다. 내정을 앞에 두고 안채가 남향하였는데 정면 8칸, 측면 3칸 반의 전 · 후퇴가 있는 두줄박이 겹집이다. 왼쪽 끝에 정면 2칸, 측면 1칸 반의 부엌을 두고, 이어 정면 2칸, 측면 2칸 도합 4칸 규모의 안방을 두었다.
방의 가운데 미서기 장지문을 달아 공간을 둘로 구획하였다. 안방 옆으로 정면 2칸, 측면 2칸의 마룻방을 시설하고 앞뒤에 각각 두짝 들어열개 들문과 두짝의 여닫이문을 설치하였다.
마룻방 오른쪽에는 정면 1칸, 측면 2칸의 온돌방을 통칸으로 두고 위쪽에서 꺾어서 또 1칸의 온돌방을 시설하고 그 사이를 미서기 장지문으로 처리하였다. 가묘는 안채의 후원에 3문을 연 방곽(方郭) 안에 별도로 설치되어 있는데 전퇴가 있는 3칸이다.
사랑채의 상량대에는 중창연대를 알 수 있는 묵서명(墨書銘)이 있는데 ‘崇禎紀元後四庚辰三月(숭정기원후 4 경진 3월)’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순조 20년(1820)에 해당된다.
집의 규모가 클 뿐만 아니라 부재도 넉넉하여서 장대하고 훤칠하다. 안채 · 사랑채의 평면구성은 겹집으로, 거창이 남쪽 지방인데도 북방성향의 겹집이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그러나 기단이 낮은 반면 툇마루가 높게 설치되어 있는 고상성(高床性)도 짙어 남쪽지방의 특색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다.
이와 같이 북방성향의 겹집에 남방성향의 고상식이 공존한다는 점에서 이 집의 학술적 가치를 찾을 수 있으며, 조선 후기 사대부주택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