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군조(君祚). 호는 석화(石華)·후산(后山). 경기도 화성 출신. 아버지는 정현풍(鄭鉉豊)이며, 어머니는 진주강씨(晉州姜氏)로 강시면(姜時冕)의 딸이다. 큰아버지 정현택(鄭鉉澤)에게 입양되었다. 임헌회(任憲晦)의 문인이다.
전우(田愚)·신두선(申斗善)·심의윤(沈宜允)·윤치중(尹致中)·서정순(徐政淳) 등과 교유하였으며, 이항로학파(李恒老學派)의 김평묵(金平默)·유중교(柳重敎)·유시수(柳始秀)·홍대심(洪大心)과도 교유하면서 심성이기론(心性理氣論)을 주기(主氣)의 처지에서 피력하였다.
1881년(고종 18) 유생들의 신사척사운동(辛巳斥邪運動)이 전국적으로 일어날 때 경기도에서는 유기영(柳冀榮)과 신섭(申㰔)이 소수(疏首)로 활동하였는데, 정윤영은 「척사만인소(斥邪萬人疏)」를 작성하여 경기유생들을 적극 지원하였다.
이에 연루되어 이원현(利原縣)에 정배되었다가 3년 만에 풀려났다. 1893년의 금부도사, 성균관직강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으며, 이듬해 학행으로 특지(特旨)에 의하여 사간원사간에 제수되었으나 역시 사양하였다.
1895년 을미사변(乙未事變)이 일어나자 “처의(處義)에 있어 신하들은 마땅히 나가서 죽어야 하고 선비들은 자정(自靖)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단발령을 내리자 「자정명(自靖銘)」을 지어 맹세하였다. 저서로는 『후산집(后山集)』·『위방집략(爲邦輯略)』·『화동연표(華東年表)』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