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조선 후기에, 형조판서, 대사헌, 좌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이정남(李井男)의 딸과 결혼했으나, 아들을 두지 못해 형 정지화(鄭至和)의 셋째아들 정재희(鄭載禧)를 양자로 들였는데, 정재희는 예조판서에 올랐다.
생애 및 활동사항
다음해 사간원정언을 거쳐 세자시강원사서(世子侍講院司書)가 되어 심양(瀋陽)에 가는 세자를 모셨다. 1640년 세자의 정조(正朝) 문안을 겸해서 귀국한 뒤, 홍문관수찬·교리·응교, 이조정랑, 의정부사인, 사헌부집의 등의 청요직을 지내다가 1649년 초 원주목사로 나갔다. 그러나 효종이 즉위하자마자 곧 세자시강원보덕에 임명되어 8개월 만에 다시 조정에 들어왔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진주사(陳奏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가서 세폐(歲幣)를 삭감하는 데 성공하고 돌아왔다. 그 뒤 병조참의가 되어 당상관에 올랐고, 이어 승지·대사간 등을 거쳤다. 한편, 외직으로 전라도·함경도·평안도의 관찰사를 지내다가 1664년(현종 5) 형조판서에 올랐다.
1674년 좌의정이 되기까지 각 조의 판서와 대사헌을 거듭 역임하면서, 1666년과 1667년 두 차례나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 연경(燕京)에 다녀왔다. 그러나 예조판서로 있던 1673년 영릉(寧陵)의 봉심(奉審)을 잘못한 죄로 관작을 삭탈당하고 한성 문밖으로 출송(黜送)되기도 하였다.
약 1년 간 시골에서 지내다가 현종이 죽기 몇 달 전에 좌의정으로 기용되었으나, 곧 신병을 칭하여 중추부판사로 물러앉았다. 현종의 죽음과 더불어 다시 복상문제가 일어나(제2차 禮訟) 송시열(宋時烈)을 비롯한 서인들이 모두 화를 입게 되었기 때문이다.
태화·치화 등 친족들과 함께 서인이면서도 항상 중도적 입장을 취하여 남인들의 극단적인 처벌론을 무마하면서 그 스스로 화를 면했을 뿐 아니라, 많은 서인들을 죽음의 처지로부터 구해내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 뒤, 1680년(숙종 6)에 다시 좌의정이 되어 한동안 정계에서 활약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세월을 중추부의 판사나 영사로 지내면서 한가히 보내다가 76세로 죽었다.
사신(史臣)은 그의 졸기에서 “본성이 성색(聲色)과 사죽(絲竹)을 즐겨 분대(粉黛:곱게 화장한 여인)가 그 옆을 떠나지 않았고, 연희(宴嬉)에 빠져서 공무를 돌보지 않았으니, 여러 경상(卿相)의 자리를 지냈어도 이룩한 바가 없다.”고 비방하면서도, 한편으로 “간당(奸黨)이 정권을 잡으면 곧 관직을 내놓고 집에 들어앉았고, 제2차 예송 때는 송시열을 죽음에서 구하는 데 크게 힘썼다.”고 칭송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효종실록(孝宗實錄)』
-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만성대동보(萬姓大同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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