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효우(孝于), 호는 낙만(樂晩). 아버지는 돈녕부판관 정흠(鄭欽)이다. 어려서부터 시명이 높았고, 특히 변려문(騈儷文)에 뛰어났다.
1613년(광해군 5) 이이첨(李爾瞻)·정인홍(鄭仁弘) 등 대북파에 의하여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모론이 대두되었을 때, 어몽렴(魚夢濂)·정택뢰(鄭澤雷) 등과 함께 극력 항소하여 이이첨 등의 처형을 주장하였다. 이로 인하여 두 사람은 유배당하였으나 그는 북관에 피신하여 화를 면하였다.
과거에 여러 차례 낙방하다가 늦게서야 1618년(광해군 10)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이후에 서용되어 효릉참봉(孝陵參奉)·전생서봉사(典牲署奉事)·자여도찰방(自如道察訪) 등을 거쳐 1652년(효종 3) 돈녕부도정에 올랐다.
1656년 80세의 나이로 해풍군(海豊君)에 습봉되고 동지돈녕부사가 되었다. 그 뒤 아들 다섯이 모두 급제하여 관직에 오른 관계로 김수항(金壽恒)의 주청에 의하여 1663년 판돈녕부사가 되었다. 시호는 제순(齊順)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