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배천(白川). 자는 인보(仁甫), 호는 남계(南溪). 부사과(副司果) 조장손(趙長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조응두(趙應斗)이고, 아버지는 부호군 조충(趙冲)이다. 어머니는 김덕윤(金德潤)의 딸이다. 큰아버지 응(凝)에게 입양되었다. 대제학 석윤(錫胤)의 아버지이다.
1590년(선조 23) 사마시에 합격하고, 1612년(광해군 4)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정자에 제수되었다가, 얼마 뒤 거산도찰방(居山道察訪)으로 나가 우정사무(郵政事務)에 큰 공적을 세웠다.
아버지의 간호를 위해 관직을 사퇴했다가 승문원저작이 되었다. 이 때 간신들이 정권을 잡고 조정을 혼탁하게 했으므로 이를 바로잡도록 상주하였다. 그 뒤 성균관전적으로 옮겼으나, 병으로 관직을 사퇴하고 전원으로 돌아가 출사할 뜻을 버렸다.
그러나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사헌부지평으로 발탁되고, 이어 성균관직강·홍문관교리·사헌부장령 등을 거쳐 사간으로 승진되었다. 이 때 원종(元宗)을 태묘(太廟)에 합제(合祭)하려고 하자, 여러 언관들과 함께 강력하게 반대하다가 인조의 노여움을 사 삭출(削黜)당하고 향리에 은거하였다. 이듬해 다시 서용되어 병조참의가 되었다가 강원도관찰사에 제수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고 왕이 남한산성으로 동가(動駕)하자 군사를 이끌고 급히 산성으로 출동, 요새를 점거하고 포를 쏘아 원군이 온 것을 성중에 알렸다. 그가 직접 군사를 독려하고 많은 적을 사살했으므로 적병은 감히 그가 포진하고 있는 동쪽으로는 진출할 수가 없었다. 1642년 관직을 버리고 제천으로 돌아가 초야에 은거하였다.
예조판서·공조판서·첨중추부사·대사간 등에 제수, 여러 차례 소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말년에도 이조와 병조의 판서에 배수되었으나 역시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