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관도(貫道). 조존성(趙存性)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조계원(趙啓遠)이고, 아버지는 이조참의 조사석(趙師錫)이다. 어머니는 윤이명(尹以明)의 딸이다. 종형이 조태채(趙泰采)·조태구(趙泰耉)이고, 동생이 조태억(趙泰億)이다.
1687년(숙종 13)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696년(숙종 22) 통덕랑(通德郞)으로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도목정사(都目政事:관리들의 정기적인 인사고과에 따라 관직의 자리를 재배치 하던 제도)를 행했는데, 이 때 겸설서(兼說書)가 되었다. 이어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이 되고, 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說書)가 되어서는 왕에게 경사(經史)와 도의(道義)를 강론했으며, 다시 겸설서가 되었다.
그 뒤 1700년 예문관봉교(藝文館奉敎)가 되어 한림(翰林: 藝文館檢閱) 홍중익(洪重益) 등의 6품직 승진의 부당함을 소청하였다. 이듬해 사간원정언이 되었는데, 이 때 그는 간관으로서의 직분과 소론의 입장을 대변하는 데 앞장섰다.
특히 대관직(臺官職)을 의망(擬望: 임금에게 1인의 관원을 뽑기 위해 3인을 추천)할 때, 이정상(李鼎相)·조권(趙權) 등의 천거가 잘못되었음을 지적했고, 전랑 이만성(李晩成)을 탄핵하였다. 또, 왕이 예문관검열 이명준(李明浚)을 신임하는 일은 부당한 것이라 비판하였다.
이어 대사간 김시걸(金時傑)과 그의 아들 영행(令行)이 호남에서 관찰사를 역임할 때 그 곳에서의 비리 행위를 조사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지나친 탄핵과 비판은 오히려 반대파의 역공을 받아 관직에서 쫓겨날 뻔했으나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 이탄(李坦) 등의 비호로 무사하였다.
이어 세자시강원 문학으로 자리를 옮겼고, 이후 1702년에는 경상우도 암행어사로 활약하였다. 11월에는 홍문록(弘文錄: 홍문관의 수찬(修撰)이나 교리를 선발하기 위한 홍문관의 제1차 인사기록)에 올랐다. 이듬해 세자시강원 문학이 되었는데, 이 때 자신이 전에 비판한 정언(正言) 조권으로부터 탄핵을 받았으나 왕의 비호를 받았다.
이어 문학으로 도당록(都堂錄: 홍문관의 수찬이나 교리를 선발하기 위해 의정부에서 추천한 제2차 인사기록)에 올라 곧 바로 홍문관 수찬이 되었다. 그는 수찬이 된 후 자파 가운데 기대한 인물이 도당록에 오르지 않자 조정의 인사정책을 비판, 물의를 일으켰고, 이 일로 관직을 낮추어 함종 현령(咸從縣令)으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1705년에 홍문관교리 박필명(朴弼明)의 구원을 입어 중앙으로 돌아와 부수찬이 되었다. 이 해 대사간에 오르고 이듬해 다시 수찬이 되었는데, 이 때 그는 이명준을 체차(遞差:관직을 교체하여 강등시킴)시키고, 전 지평 송택상(宋宅相)을 탄핵하여 파직시켰다. 또, 당시 정배 중에 있던 노론 김진규(金鎭圭)·김춘택(金春澤) 등의 죄가 가벼움을 들어 엄형을 더할 것을 탄핵하였다.
그 뒤 홍문관의 부수찬·부교리, 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 홍문관의 수찬·부교리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그는 부교리로 재임할 때 숙종의 즉위 30년을 기념하는 축하연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이어 1707년에는 겸사서를 거쳐, 홍문관응교가 되었다. 그는 정파로는 소론으로 자파의 입장을 옹호하는 데 앞장섰으나 크게 화를 입지는 않았다.
부친 사석(師錫)이 유배 생활에서 죽은 뒤 1694년에 복관되기까지 어려웠던 시기를 목도했지만, 과격하게 정적을 배척하지는 않았던 인물로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