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한위

  • 역사
  • 인물
  • 조선 후기
조선 후기에 세자시강원문학 · 승지 · 대사간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 공서(公西)
인물/전통 인물
  • 본관풍양(豊壤)
  • 사망 연도1740년(영조 16)
  • 성별남성
  • 주요 관직승지|대사간
  • 출생 연도1679년(숙종 5)
집필 및 수정
  • 집필 1995년
  • 강병수
  • 최종수정 2025년 03월 0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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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조선 후기에 세자시강원문학 · 승지 · 대사간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1726년(영조 2) 전 현감으로 알성문과에 을과로 급제했다. 1731년 홍문관수찬이 되었고, 이 해에 관북어사로 파견되어 이듬해까지 활약하였다. 1733년 부응교(副應敎)로 다시 등용되고, 부수찬·사간을 여러 차례 역임한 뒤에 1735년 다시 부응교가 되고, 이듬해는 세자시강원문학이 되었다. 이 해에 승지를 거쳐 대사간에 오르고, 1737년에는 다시 승지에 복귀되었으며, 1739년에 대사간이 되었다.

정의

조선 후기에 세자시강원문학 · 승지 · 대사간 등을 역임한 문신.

내용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공서(公西). 조내석(趙來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조지헌(趙持憲)이고, 아버지는 조명인(趙命仁)이다. 어머니는 이광직(李光稷)의 딸이다.

생애와 활동사항

1711년(숙종 37)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이어 여러 벼슬을 거쳐 1721년(경종 1) 양성현감(陽城縣監)이 되어서는 사헌부로부터 탄핵을 받기도 했으나 왕의 비호를 받았다.

그 뒤 1726년(영조 2) 전 현감으로 알성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이듬해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이 되었다. 1728년 사헌부지평이 되어 전(前)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김취로(金取魯)를 탄핵, 파직케 하였다.

이 해 다시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이인좌의 장인 윤경제(尹景濟)를 유배형에 그친 처벌을 하자 그를 다시 엄한 형으로 다스릴 것을 상소하였다. 그는 당색이 소론으로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이 되어 노론 당색이 강한 영중추부사 민진원(閔鎭遠)을 탄핵했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이 후 이 일로 오히려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 권혁(權爀)의 탄핵을 받기도 했으나, 왕이 사당(私黨)을 불러일으킨다 하여 권혁을 파직시켰다. 그 뒤 1729년 도당록(都堂錄: 홍문관의 修撰 · 校理 등을 선발하기 위한 의정부의 제2차 인사기록)에 올랐다.

이어 다시 사헌부지평이 되었는데, 그는 왕실에서 제수(祭需)에 쓸 물자를 유사(有司)에게 빌려다가 쓰는 현실의 문제점을 비판하였다. 즉, 내수사(內需司)가 유사에게 물자를 빌려쓰면서 왕실에서는 이런 행위를 오히려 당연히 여겨 유사가 왕실로부터 은전을 받는 기회를 얻게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그런 자세는 왕실의 권위를 실추시키는 일이라고 비판하였다. 이러한 문제 제기로 많은 논란이 있었으나 결국 그의 주장대로 일이 성사되었다.

그 뒤 도당록의 성적이 높아 홍문관수찬이 되고, 이어 다시 사헌부지평이 되었다. 이 해 홍문관교리가 되어서는 삼사 합계로 이인좌가 난을 일으킬 때 추대인으로 지목되었던 여흥군(驪興君) 해(垓)와 여릉군(驪陵君) 기(圻)의 죄를 논했는데 계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사직소를 올렸다. 그러나 왕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그를 홍문관부교리로 임명하였다.

이어 부교리에서 홍문관수찬이 되어 다시 지난날의 종실의 죄를 강력하게 주청했는데, 이 일로 그는 강진현감으로 좌천되었다. 1731년 다시 중앙으로 돌아와 홍문관수찬이 되어 강진현감으로 재직했을 때의 경험을 들어 군액(軍額)의 과다, 제주 지역 공마(貢馬) 운송의 폐해, 남당포(南塘浦)의 해상 방어의 어려움, 유배된 자의 과다로 이들 죄인의 응접을 위한 백성들의 고통, 잦은 수령의 교체로 인한 백성들의 영송의 과다 등 다섯 가지 시정책을 건의하였다.

이 해 홍문관교리를 거쳐, 이듬해 다시 홍문관수찬이 되어서는 진휼의 본뜻이 왜곡되어 진정으로 재해를 입은 기민들에게 혜택이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부유층을 도와주는 형국을 비판, 이에 대한 시정을 촉구하는 소를 올렸다. 그 뒤 부수찬을 지내고 교리가 되어 호서 지역의 부족한 진휼곡을 늘이게 하였다.

이어 홍문관수찬이 되고, 이 해에 관북어사로 파견되어 이듬해까지 활약하였다. 1733년 부응교(副應敎)로 다시 등용되고, 사헌부헌납이 되어 사직소를 올리면서 자신이 암행했던 관북 북로의 산천에 대한 지도를 그려 이 지형에 따른 정책시행안도 함께 올렸다. 이어 헌납이 되어서는 기황이 가장 심한 호남의 성축조의 역사를 중지시켜 농경에 전념하도록 할 것을 주청하였다.

그 뒤 부수찬 · 사간을 여러 차례 역임한 뒤 1735년에는 부응교가 되고, 이듬해는 세자시강원문학이 되었다. 이 해에 승지를 거쳐 대사간에 오르고, 1737년에는 다시 승지에 복귀되었으며, 1739년에 대사간이 되었다.

참고문헌

  • - 『경종실록』

  • - 『영조실록』

  • - 『국조방목』

  • - 『사마방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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