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극원(克遠), 호는 수죽헌(數竹軒). 조세흠(曺世欽)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조희인(曺希仁)이고, 아버지는 조광복(曺光福)이며, 어머니는 여흥민씨(驪興閔氏)로 충의위(忠義衛) 창(昌)의 딸이다.
1579년(선조 12) 진사시에 합격하고, 1588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 탐화랑(探花郎)이 되어 궐정(闕庭)에 나가 임금을 만났다. 선조가 그 풍채의 아름다움을 보고 인물을 얻었다고 감탄하였다.
한성부참군에 제수되고, 이어 사재감직장·사간원정언을 거쳐 1590년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나라에 들어가게 되었으나 연로한 아버지의 봉양를 위하여 사퇴하였다. 그 뒤 사헌부지평, 병조·형조의 정랑을 거쳐 통제사의 막좌(幕佐)로 나갔다.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한 뒤 대북파의 전횡이 심하여지자, 벼슬을 단념하고 고향에 내려갔다가 1623년 인조반정 뒤에 영광군수에 임명되었으나 얼마 안 되어 파직되었다. 뒤에 다시 등용되어 사섬시정·사도시정·승문원판교 등을 역임하고 옥당에 들어가 부교리가 되었다.
1626년(인조 4) 동부승지에 제수되었다가 여주목사가 되었는데, 1628년 유효립(柳孝立)의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하동에 유배되었다가 혐의가 없음이 밝혀져 곧 방면되었다.
그 뒤 나이가 71세였으므로 벼슬에서 은퇴하고 오로지 교육에 힘써 많은 후진을 양성하였다. 1637년 80세에 우로(優老)의 특전에 따라 가선대부(嘉善大夫)의 위계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