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 ‘해운당(海運堂) 의징(義澄)’의 비가 발견되었는데 상좌인 수견 천심(守堅天心)이 1698년에 비를 세웠다고 적혀 있다. 1973년 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으로 옮겨졌다. 1997년에는 취암 정여(就岩靜如)의 탑이 수습되어 현재 여주박물관에 있다.
2009년의 학술조사에서는 5개의 건물지가 확인되었다. 당시 조사 결과를 통해 17∼18세기에 주어사가 어느 정도의 규모를 갖춘 사찰이었으며 19세기에 폐사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2022년에는 여주시 차원에서 주어사 일원에 대해 사명 및 사역을 확인하고 사지의 역사성을 규명하기 위해 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시굴조사 결과 건물지 3동, 석축, 폐사 이후 건립된 숯가마 등이 확인되었다. 유물 중에는 고대 인도문자인 범자(梵字)가 찍힌 막새편과 '조와이주신(造瓦以主信)'명 와편, 17세기 관요에서 제작된 백자편 등이 확인되었으며,
이 유물들을 토대로 주어사의 중심 연대는 17세기로 판단되었다. 주어사는 조선 중기부터 후기까지 존속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접근이 어려운 입지임에도 불구하고 명문 기와편과 양질의 백자편이 확인되고 선사의 탑비와 승탑 등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사세가 작지 않은 사찰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1768년부터 1783년까지 남인 계열 학자들의 강학 모임이 여주 주어사와 광주 천진암(天眞庵)에서 열렸다. 1779년(정조 3)에는 이익(李瀷)의 제자로 촉망받던 권철신(權哲身)이 주도한 주어사와 인근 천진암의 강학에 정약용(丁若鏞)의 친형이자 『자산어보(玆山魚譜)』의 저자 정약전(丁若銓), 뒤에 천주교 신자가 된 이벽(李檗) 등이 참가했다.
당시 권철신이 거주한 경기도 광주 감호(鑑湖: 현재 양평군 강상면)에서 멀지 않았기 때문에 주어사가 강학 장소가 된 것이다. 이때 유교 경서인 『중용(中庸)』을 필두로 『시경(詩經)』, 『서경(書經)』, 『예기(禮記)』, 『악기(樂記)』, 『역경(易經)』, 『춘추(春秋)』의 6경, 그리고 사단칠정(四端七情)에 관한 안정복(安鼎福)의 학설, 주희(朱熹), 정이천(程伊川) 등의 「숙야잠(夙夜箴)」·「경재잠(敬齋箴)」·「사물잠(四勿箴)」·「서명(西銘)」을 강학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런데 파리외방전교회 신부인 샤를르 달레(Charles Dallet)의 『한국천주교회사』(1874)에는 1777년 조선의 어느 사찰에서 권철신, 정약전 등이 서학 공부와 천주교 신앙을 실천했다는 내용이 있다. 구체적으로는 “10여 일의 강학에서 유교 개념을 논의하고 철학·수학·과학·종교 등 서학 서적을 검토했다. 또 실천을 위해 매일 아침저녁으로 엎드려 기도했으며 매월 7일 간격으로 일을 쉬고 묵상을 했다”라고 적고 있다.
그렇지만 이 책의 내용은 다블뤼(Daveluy, M.N.A., 安敦伊) 신부가 조선에서 파리로 보내준 각종 자료를 바탕으로 간접 기술된 것이기 때문에 정확하지 않거나 왜곡될 수 있다는 점, 정약전 묘지명 등을 포함한 다른 기록들에 1777년 천주교 강학 관련 내용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해당 내용의 신빙성은 약한 편이다.
주어사는 해운당대사의징비, 취암당대사탑 등을 통해 볼 때 조선 후기 이전부터 있었던 사찰로 추정된다. 또한 사지 내에 고려시대 유물도 산포되어 있어, 그 역사가 고려시대까지 소급될 가능성이 있다. 주어사지는 2012년 7월 이후 여주시 향토유산으로 관리되고 있다.
주어사는 조선시대에 남인 유학자들이 유교 경서 등을 강학했던 장소로 알려져 있다. 이 강학에 천주교 관련 내용이 포함되었다면 주어사는 유불 교류의 장을 넘어 당시 불교의 포용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