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권 2책의 목판본이다. 현재 국립중앙도서관,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등에 소장되어 있다.
1792년(정조 16)에 신활(申活, 15761643)의 4대손인 신방달(申邦達)이 유고(遺稿)를 정리하여 이주원(李周遠, 17141796)에게 교정을 받았다. 이후 문집이 언제 누구에 의해 간행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문집의 서문을 쓴 한치응(韓致應, 1760~1824)의 품계가 ‘ 숭록대부(崇祿大夫)’로 되어 있어, 한치응이 숭록대부가 된 1823년과 그가 세상을 떠난 1824년 사이에 서문이 지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1792년에 신활의 유고가 정리되었고 1823년 이후에 죽로문집이 간행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권수에는 조술도(趙述道)와 한치응의 서문이 있으며, 권말에는 이주원과 이우재(李愚在)의 발문이 있다.
권1에 시 104수, 만사 8수가 수록되었고, 권2에 소(疏) 1편, 서(書) 4편, 서(序) 3편이 수록되었다. 권3에 기(記) 2편, 잡저 6편이 수록되었고, 권4에 부록으로 저자에 관한 연보 · 행장 · 묘갈명 · 묘지명 · 미산서원상량문(眉山書院上樑文) · 봉안문 · 상향축문 등이 수록되었다.
대표작으로는 50년간 임하(林下)에서 지낸 자신의 불우를 슬퍼하면서 부귀는 이미 자신이 바라는 바가 아님을 읊은 「자도(自悼)」, 궁핍함과 통달함은 운수에 달린 것이니 누가 이것을 할 수 있겠느냐는 내용의 「술회(述懷)」 등이 있다. 「회고(懷古)」 · 「과남승정(過攬勝亭)」 등은 당시의 사회 상황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지은 시이다. 「문서보(聞西報)」는 병자호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접하고 지은 시이다. 이밖에 「문심양변입산서회(聞瀋陽變入山書懷)」 · 「탄시사술회(歎時事述懷)」 등은 급변하는 시사와 그것을 바라보기만 하는 자신의 무능함을 읊은 것으로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이주원은 『죽로문집』의 서문에서 신활의 시에 대하여 “맑고 뛰어나며 높고 전아하다[淸逸高雅].”라고 평하였다.
소는 대략 6,000어(語)의 장편으로 1623년에 지은 것이다. 광해조 때 백성들을 괴롭혔던 낡은 관습이 인조반정 후에도 혁파되지 않고 미납한 전세를 추징하는 일을 지적하면서, 어진 정치를 행할 것을 촉구하기 위하여 작성한 글이다. 정치 · 경제 · 군사 · 교육 등 국사 전반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당시의 사회 정황과 백성들의 고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자료이다.
서(書)는 대부분 장현광(張顯光)에게 예를 묻고 그에 대한 답변을 받은 내용이다. 「상방백장(上方伯狀)」은 1608년 학교 교육의 육성을 관찰사에게 건의한 것이다.
기의 「관어대유행기(觀魚臺遊行記)」는 1598년(선조 31) 3월 15일 이색(李穡)이 노닐던 관어대에 가서 그 뛰어난 경치와 감회를 적은 작품이다.
잡저는 주로 상례(喪禮)에 관한 것이다. 이 가운데 「서울릉도도후(書鬱陵島圖後)」가 주목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