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술도 ()

만곡문집
만곡문집
유교
인물
조선 후기에, 『유석명분변』, 『운교문답』 등을 저술한 학자.
이칭
성소(聖紹)
만곡(晩谷)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729년(영조 5)
사망 연도
1803년(순조 3)
본관
한양(漢陽)
출생지
영양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조선 후기에, 『유석명분변』, 『운교문답』 등을 저술한 학자.
개설

영양 출신.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성소(聖紹), 호는 만곡(晩谷). 할아버지는 조덕린(趙德鄰)이고, 아버지는 조희당(趙喜堂)이며, 어머니는 장수황씨(長水黃氏)로 황종만(黃鍾萬)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청년기까지는 과거 공부에 종사했으나 1759년(영조 35) 동생 조진도(趙進道)가 문과에 합격하고도 조덕린의 손자라는 이유로 삭과(削科)되자 과거를 단념하고 성리서를 탐독하였다. 향인들이 조술도를 월과(月課)의 학정(學正)으로 추대하자 상벌을 엄격하게 행하는 한편, 여씨향약(呂氏鄕約)에 준해 생도들을 가르쳤다.

1765년(영조 41) 이상정(李象靖)·김낙행(金樂行)의 문하에 입문하고, 김종덕(金宗德)·유장원(柳長源)·이종수(李宗洙)·정종로(鄭宗魯)와 학문을 토론하였다. 1776년에는 월록서당(月麓書堂)을 지어 후학들을 지도하고 ‘만곡(晩谷)’으로 자호하였다.

조술도는 조부 조덕린의 신원운동을 위해 수차례 서울을 왕래했으며, 당시 남인의 영수 채제공과도 자주 접촉하였다. 그 결과 1789년(정조 13)에는 신원운동이 성사되고 채제공과의 관계도 더욱 밀접해졌다.

조술도는 유학의 가르침에 충실해 서학(西學)·노장(老莊)에 대해서는 매우 엄정한 입장을 취했으며, 일생 사서(四書)·『심경(心經)』·『근사록(近思錄)』·주자서(朱子書)를 애독하였다. 만년에는 도선서원 유생들을 위해 「향음주고정의식(鄕飮酒攷定儀式)」을 제정하고, 『주서강록간보(朱書講錄刊補)』를 교열하였다. 경세론에도 조예가 있어 영양현감을 대신해 지은 9조항의 권농책(勸農策)은 유명하다.

저서

저서로는 『만곡집(晩谷集)』, 불교를 유교적 입장에서 비판한 『유석명분변(儒釋名分辨)』, 서학을 유교적 입장에서 비판한 『운교문답(雲橋問答)』이 있다.

참고문헌

『대산전서(大山全書)』
『만곡집(晩谷集)』
『정재집(定齋集)』
『해은집(海隱集)』
관련 미디어 (2)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