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주산성은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의 북진 과정에서 축조한 성곽이다. 신라의 한강 유역 진출 과정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축조된 산성이다. 고려 1236년에 송문주가 몽골군과 15일간 전투를 해서 승리한 곳이다. 이 산성은 한양으로 통하는 요충지였기 때문에 조선 시대에도 지속적으로 활용되었다. 죽주산성은 내성, 중성, 외성 등 3중 성벽 구조이다. 내성은 조선 시대, 중성은 신라 시대, 외성은 고려 시대에 축조되었다. 전체 둘레는 1688m 정도이다. 죽주산성은 시대별 성벽 축조 방법과 활용을 살펴볼 수 있는 유적이다.
죽주산성은 1236년(고종 23) 죽주방호별감 송문주가 몽골군과 15일간 전투를 펼쳐서 승리한 곳이다. 이는 6차에 걸친 몽골 침입에서 고려가 승리한 대표적인 전투 중 하나이다. 조선시대에도 한양으로 통하는 전략적 요충지로 인식되어 지속적으로 산성을 보수하여 활용하였다. 국난극복의 성지로 알려져 산성에 대한 정비가 추진되었고 그 과정에서 2001년부터 발굴조사도 연차적으로 실시되었다. 그 결과 죽주산성은 내성, 중성, 외성 등 3중 성벽으로 구조로 밝혀졌다. 내성은 조선시대, 중성은 신라시대, 외성은 고려시대 등 축조시기도 규명되었다. 전체 둘레는 약 1688m이고 원래 높이는 6∼8m(내성 및 복원 성벽은 2.5m 내외) 정도이다.
죽산(매산리)은 영남대로가 조령과 추풍령 방면으로 갈라지는 분기점이었다. 삼국시대부터 전략적 요충지였고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도성의 방어와 관련하여 중요시되었다. 6세기 중반경 신라가 북진하는 과정에서 서울 지역과 대중국교역항이 있었던 당항진(남양만 일대)으로 진출하기 위한 거점으로 산성이 축조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중성 북동쪽 2개의 능선과 계곡을 막아 외성을 축조하였다. 축조시기는 출토되는 기와편으로 보아 고려 전기(광종∼현종)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에는 중성을 수축하고 그 안으로 내성도 축조하였다. 그 시기는 임진왜란 이후(광해군)로 추정되며 성벽을 겹겹히 두어 방어력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다. 치성에는 왜성의 축조 기법을 도입하고 포루도 설치하였다.
죽주산성 발굴조사는 주로 성벽에 대하여 실시되었다. 복원성벽이 붕괴되어 보수하면서 동벽과 남벽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대부분의 성벽은 최소 3차례 이상의 수축한 흔적이 보인다. 성벽은 체성과 보축성벽으로 나누어진다. 보축성벽은 한강 유역 신라 산성 중 가장 빠른 시기의 성벽이다. 다듬지 않은 돌을 사용하여 단면 삼각형의 형태로 외벽 하단부를 덮은 형태이다. 석재를 약 45° 각도로 기울여 쌓아 올라가고 그 전면에는 다시 점토를 다져서 덮은 형태이다. 이러한 형식은 성벽에 부분적으로 보축을 하거나 단면을 계단식으로 축조하는 후대의 양식에 선행하는 것이다.
체성벽은 풍화된 암반의 경사면을 계단식으로 삭토하여 기초를 조성하고 경사진 지반에 의지하여 석재로 외벽을 쌓았다. 다시 석벽 내부는 점토를 다져 넣어 빗물이 스며드는 것을 막았다. 계곡부를 통과하는 지역은 외벽과 내벽을 모두 축조하여 더욱 단단하게 쌓았다. 성벽의 높이와 너비는 1:1의 비율을 이루고 있다. 또한 외벽을 따라서 외항(성벽 앞에 땅을 파거나 석재로 도랑을 만든 방어시설)이 둘러쳐 있는 것도 특징적인 것이다. 전반적으로 죽주산성의 성벽은 영남지방의 신라산성의 형식이 한강 유역으로 전달되는 과도기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성벽은 신라시대 체성벽 상면에 축조되었다. 대부분 무너지고 일부에 흔적만 보이고 있다.
성내부에서는 신라시대에서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사용된 계단식 저수시설 8기가 출토되었다. 물이 흘러내려가는 낙차를 고려하여 계단식으로 저수시설을 배치하여 물을 활용하고 조경시설도 꾸몄다. 저수시설 내부에서는 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각종 기와와 토기 및 무기류와 공구류 등이 출토되었다.
죽주산성은 신라의 한강 유역 진출 과정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축조되어 신라의 북진 전개 과정을 살펴 볼 수 있는 유적이다. 또한 신라말 지방세력(기훤, 궁예)과 관련되어 있고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기록에도 자주 보이고 있다. 고고학적으로는 각 시대별 성벽 축조 방법과 활용 변화를 살펴볼 수 있는 유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