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9년(원종 10) 4월 세자 왕심(王諶: 뒤의 충렬왕)이 처음 몽고에 들어갈 때 시종하였고, 이해 7월 세자가 돌아올 때 파사부(婆裟府)에 이르러 원종이 폐위당한 것을 듣고 되돌아갔다가 귀국할 때까지 나유(羅裕)·김응문(金應文) 등과 함께 세자를 시종하였다.
1280년(충렬왕 6) 장군으로 임비(林庇)와 함께 시사(侍史) 심양(沈陽)을 숭문관(崇文館)에서 국문하였다. 심양이 잡단(雜端) 진척(陳倜), 시사(侍史) 문응(文應), 전중시사(殿中侍史) 이승휴(李承休) 등과 더불어 “지금 나라 형편이 매우 어렵고 하늘이 가물어 백성이 굶주리니 사냥[遊田]하고 안락할 때가 아닌데 전하는 어찌 백성을 구휼치 않고 사냥하는 데 탐닉하십니까.”라고 왕의 지나친 수렵과 사치행락 등 시정(時政)에 관한 일을 간하다가 왕의 미움을 샀기 때문이다. 1282년에는 앞서 세자를 시종한 공으로 대장군으로서 2등공신이 되었다. 지첨의부사(知僉議府事)에 이르러 치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