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영취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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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경에 설치된 진(鎭)을 중심으로 형성된 취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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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변경에 설치된 진(鎭)을 중심으로 형성된 취락.
내용

군사기지가 설치되고 군대가 주둔함으로써 훈련장·탄약고·부속 시설 등의 군사 시설과 군인의 숙소, 군인 가족의 주택과 약간의 상점이 모여 형성된 군사취락이다.

군사적 기능과 행정적 기능이 복합되어 있는 중심취락보다는 군사적 기능 수행에 더욱 편중되어 있기 때문에 그의 기원은 변경취락에서 찾아볼 수 있다. 변경취락의 목적은 고구려의 옛 땅을 수복하는 데 있기 때문에 대부분 북쪽에 위치, 분포한다.

그러므로 진영취락은 북진정책을 수행해 나가는 과정에서 외세의 주저항선연변(主抵抗線緣邊)에 집중 분포한다. 북방의 취락 분포는 다시 청천강 유역의 서북부와 용흥강(龍興江) 유역의 동북부로 나눌 수 있다.

서북부는 서안(西岸)의 정주에서 시작하여 내륙의 희천에 이르는 청천강 수계의 안주(安州)·박천평야(博川平野)와 운산·영변분지를 포괄하며, 동북부는 용흥강 유역의 영흥평야를 중심으로 안변과 정주 사이의 고원·문천·덕원을 포함한다.

그러나 고려 시대 현종이 5도 양계로 행정구역을 개편하는 과정에서 서북부는 서계, 동북부는 동계로 편입시켰다. 이 밖에도 신라 시대에는 동해안의 말갈을 막기 위한 북진(北鎭: 三陟)과 서해안의 방비를 목적으로 패강진(浿江鎭: 平山)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이 밖에 해안의 방어를 위하여 청해진(淸海鎭: 莞島)·당성진(唐城鎭: 南陽)·혈구진(穴口鎭: 江華) 등이 있었다.

이러한 진제도는 고려 시대에 확립되어 조선 시대에 세종의 4군6진 설치가 있은 뒤 적극적인 북방정책으로 많이 설치되었다. 1457년(세조 3)에 주요한 지역을 거진(巨鎭)으로 하고 나머지 주변 지역의 여러 진을 그에 속하도록 하는 진관체제(鎭管體制)로 개편되었다.

진영취락은 당시의 지리적 단면을 파악할 수 있는 경관적 유구(遺構)가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서계에 있는 보루와 참호가 이들을 입증해준다. 보루는 성곽을 의미하고 참호는 성곽 외부에 파놓은 구덩이라 생각할 때, 이들은 외적 방어를 목적으로 구축한 진영취락의 중심적·가시적인 경관 구조라고 추정된다.

오늘날 대부분의 진은 지명에서 사라졌으나, 압록강·두만강 연안의 국경취락에 아직도 혜산진(惠山鎭)·중강진(中江鎭)·만포진(滿浦鎭) 등 지명이 남아 있다.

참고문헌

『朝鮮の聚落』(善生永助, 朝鮮總督府,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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