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8년(창왕 1) 8월에 전 판사(判事)로서 유구국(琉球國) 사신의 영접사가 되어 사신을 접반하였고, 공양왕이 즉위하려고 남경(南京)에서 송도로 돌아올 때 길일을 가려서 돌아오려고 하자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 정습인(鄭習仁)과 함께 옳지 않음을 간하였다.
1390년(공양왕 2) 우상시(右常侍)가 되고 1391년 정월에 윤구택(尹龜澤)을 판서운관사(判書雲觀事)로 제수한 고신(告身)에 서명하지 않았다 하여 귀양갔다가 10월에 돌아왔다. 1401년(태종 1)에 좌사간으로서 대사헌 이지(李至)를 탄핵하였다가 광주(廣州)에 안치되었다.
곧 풀려나 다음해 형조전서로서 만산군(漫散軍) 임팔랄실리(林八刺失里)를 압송하여 요동에서 명나라의 만산군 추쇄사(推刷使)에게 넘겨주고 돌아왔다. 1409년 8월에 이조참의가 되고 세종 때에 공안부윤(恭安府尹)으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