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수원(水原). 속명은 백상규(白相奎). 법호는 용성(龍城). 법명은 진종(震鍾).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남원 출신. 아버지는 남현(南賢)이며, 어머니는 손씨(孫氏)이다. 일제강점기 불교계의 지도자로서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의 하나였으며, 경전 번역 등을 통하여 불교의 현대화와 대중화에 앞장섰다.
7세에 한학(漢學)을 배우기 시작하여 9세에 「합죽선(合竹扇)」이라는 시를 지었다. 16세 때 가야산 해인사의 극락암(極樂庵)으로 출가하여 화월(華月)을 은사로, 혜조(慧造)를 수계사(授戒師)로 삼아 승려가 되었다. 그 뒤 의성 고운사(孤雲寺)의 수월(水月) 밑에서 수행하고, 양주 보광사(普光寺)의 도솔암(兜率庵)에서 정진하였다.
이때부터 무자(無字) 화두를 참구하여 그 의심을 풀었다. 1884년 양산 통도사의 선곡율사(禪谷律師)로부터 비구계와 보살계를 받았고, 조계산 송광사의 삼일암(三日庵)에서 정진하던 중 『전등록(傳燈錄)』을 보다가 대오(大悟)하였다.
그 뒤 33인의 승려를 모아지리산 상선암(上禪庵)에서 참선을 지도하는 한편, 각종 경전을 섭렵하였다. 계속 정진하면서 혜월(慧月) · 만공(滿空) 등과 교유하였고, 금강산 불지암(佛地庵), 보개산 성주암(聖住庵), 북한산망월사(望月寺)에서 많은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1905년 보개산에 관음전(觀音殿)을 세우고 『선문요지(禪門要旨)』를 저술하였다.
1906년 법천암(法泉庵)에 선원을 건립하였고, 1907년 중국으로 가서 중국 불교계를 2년 동안 시찰하였다. 1910년 지리산 칠불암(七佛庵) 선원의 조실(祖室)로 추대되어 많은 수행자들을 지도하면서, 저술 작업과 번역 사업에 착수하였다.
1911년 서울에 와서 포교를 시작하여, 다음 해 대사동에 선종교당(禪宗敎堂)을 세워 현대적 포교에 앞장을 섰다. 그 뒤 서울 봉익동에 대각사(大覺寺)를 건립하였다. 1919년3·1운동 당시에는 한용운(韓龍雲)과 함께 민족대표 33인 중 불교의 대표자로 참가하였다. 3년 동안 옥고를 치른 뒤 1921년 3월에 출옥하였다.
그 뒤 서울 가회동에서 삼장역회(三藏譯會)를 만들어 저술사업에 몰두하여, 『심조만유론(心造萬有論)』, 『각해일륜(覺海日輪)』, 『석가사(釋迦史)』, 『팔상록(八相錄)』 등을 저술하였다. 또, 양산 내원사(內院寺)만일선원(萬日禪院)의 조실로 있으면서 1926년 4월부터 1927년 10월까지 『화엄경』 80권을 한글로 번역하였다.
1925년에는 서울 대각사에 대각교(大覺敎)를 창립하여 새로운 불교운동과 국민계몽운동을 시작하였다. 그 뒤 만주 용정(龍井)에 가서 화과원(華果院)을 경영하는 한편, 그곳에 대각교당(大覺敎堂)을 건립하고 선사상을 포교하는 등 선농일치운동(禪農一致運動)을 전개하였다. 특히, 사원경제의 자립을 위해서는 농사를 짓고 경작을 하면서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스스로 호미 등의 연장을 들고 노동하였다.
또한, 불교 포교의 일환으로 박한영(朴漢永)과 함께 불교잡지인 『불일(佛日)』을 간행하였고, 일요일마다 법회를 여는 일요학교를 개설하였다. 그리고 불교의식과 염불을 완전히 우리말로 번역하여 집전하였고, 『찬불가(讚佛歌)』를 지어 부르도록 하였다.
그 밖에도 선을 보급하기 위하여 도봉산 망월사에 ‘활구참선만일결사회(活句參禪萬日結社會)’를 조직하였다. 또한 총독부에서 주지가 되려면 비구계를 갖추어야 한다는 전통적인 조항을 삭제하려는 움직임이 있자 건백서(建白書)를 총독부에 제출하여 강력히 반대하였다.
나이 76세, 법랍 61세로 입적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사리탑이 해인사용탑선원(龍塔禪院) 옆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