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대전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지정면적 11,107㎡, 둘레 약 800m. 현재 문지(門址)·수구지(水口址)·우물터 등이 남아 있다.
이 성은 안으로는 흙을 다져 쌓고 밖으로는 돌을 쌓는 내탁외축(內托外築)한 규모가 큰 테뫼형산성(산 정상을 둘러쌓은 성)으로, 동쪽 성벽 일부는 안팎으로 돌을 쌓는 협축(夾築)을 하였다.
이 성은 오늘날의 대전과 회덕 방면에서 동쪽으로 충청북도 회인(懷仁)과 문의(文義) 방면으로 통하는 요로를 지키기 위하여 백제 때 쌓은 것으로 보이는데, 성벽의 높이는 1.5m이고, 석루(石壘)의 상부 너비는 4.2m이며, 남문지의 너비는 약 6m, 동문지의 너비는 약 3.5m이다.
성안에는 지금도 사용할 수 있는 좋은 샘물이 나오고 있다. 성의 동북쪽 성벽은 90×20㎝ 정도의 석재를 사용하여 축조되어 있다.
성안에서는 백제시대 토기조각을 비롯하여 신라시대 토기조각과 조선시대 자기조각까지 출토되고 있어서, 삼국시대부터 조선 말엽까지 계속해서 사용하여 온 산성으로 추정된다. 이 산성에는 주위에 7곳의 보루(堡壘)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뒤 665년(문무왕 5)에 문무왕은 웅진도독 부여 융(扶餘隆)과 더불어 웅진 취리산(就利山)에서 백마를 잡아 피를 나누어 마시면서 맹약을 하였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그 웅진의 취리산은 현재의 공주(웅진)지방에 있다고 알려져 왔다.
그러나 이 성의 부근에 주산리(注山里, 줄뫼)와 비룡리(飛龍里, 줄골)가 있고 질현은 곧 질티이므로 이곳이 취리산이라는 견해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