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국가민속문화재(현, 국가민속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이 집은 현 소유자 조창래(趙昌來)의 2대조이며 호가 후송(後松)인 조용정(趙鏞正)이 건립한 것이다. 사랑채는 일제 때인 1935년에, 안채는 광복 직후인 1947년에 각각 건축되었다.
현동면에서 1㎞ 떨어진 안덕으로 가는 길목 평지에 행랑채와 곳간채, 중문간채와 안채, 사랑채 등이 전후로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행랑채는 一자형으로 솟을대문간 좌우에 방 · 창고 · 변소 등이 배치되어 있으며 이에 접하여 □형의 곳간채가 위치한다. 행랑채에 난 솟을대문을 통하여 들어서면 사랑마당에 이르게 된다.
사랑채는 대청과 우측의 사랑방이 다같이 ㄴ자형으로 맞물려 있는 배치를 보이고, 대청의 우측에는 2칸통의 온돌방을 설치하였다. 사랑채 전면에는 툇마루를 설치하고 헌함(軒檻)을 돌렸으며, 대청 전면에는 미세기 유리창문을 달았다. 좌측 사랑방 뒤쪽에는 마루방과 고방을 돌출시켰다.
우측 온돌방 뒤쪽으로는 가마솥이 달린 욕실과 변소를 달아내고 측면과 배면(背面)에 설치된 쪽마루를 통하여 서로 연결되도록 하였다.
중문간채에는 안뜰로 출입하는 중문을 비롯하여 마구간 · 방앗간, 하인들이 거처하던 방과 부엌 등이 ㄴ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안채 전면에 위치한 ㄴ자형 중문간채는 그 우측에 있는 사랑채와 더불어 튼입구자로 내정을 에워싸고 있다. 중문을 통하여 내정으로 들어가면 정면 6칸, 측면 1칸의 전퇴가 있는 안채가 나타난다.
안채는 남부지방의 一자형 평면의 기본형을 충실하게 따른 평면구성을 보이고 있다. 평면 중앙에 있는 마루는 전면에 살문을 단 마루방으로 꾸며져 있다. 평면의 오른쪽 끝에 위치한 부엌을 제외한 전면에는 툇마루를 설치하였다.
마루 밑은 붉은 벽돌로 영롱장(玲瓏墻)쌓기를 하였으며, 건물의 측면과 배면에도 쪽마루를 돌렸다. 안방은 2칸통의 온돌방으로 부엌 쪽 벽에 붙박이장을 설치하였다.
안채는 시멘트 모르타르로 마감한 기단 위에 네모기둥을 세웠다. 마루방 상부 가구(架構: 재료를 서로 결합하여 만든 구조물)는 5량가(樑架)로 각대공(角臺工)을 놓아 장여와 마루도리를 받치도록 하였다.
마루도리의 밑면에 “단기 4280년……상량”이라 기록되어 있다. 사랑채는 전면의 툇마루 기둥만 두리기둥을 썼으며 나머지는 방주를 세웠다. 대청 상부는 5량가로 원형 판대공(板臺工)을 세웠다.
마루도리 장여 밑면에 “소화 10년 을해 7월 8일 갑인 기시 정초(定礎), 동월 18일 갑자 사시 입주(立柱), 동월 21일 정묘 진시 상량”이라 기록되어 있다.
전체규모가 50칸이 넘는 규모의 주택이지만, 안채와 사랑채의 축대가 낮고 지붕 용마루도 우뚝하지 않아 웅장하고 고졸(古拙: 기교가 없고 서툴러 보이나 예스러운 멋이 있음.)한 맛은 없다.
다만 욕실과 변소를 건물 내부에 수용하고 붉은 벽돌과 유리창문을 사용한 점 등은 광복을 전후한 시기에 우리 가옥이 변천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