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7년(영조 3)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조상치(曺尙治)의 학덕과 충절을 추모하기 위해 창수사(蒼水祠)를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741년 ‘창주(滄洲)’라 사액되었으며, 1823년(순조 23) 조한보(曺漢輔)·조한영(曺漢英)·조선장(曺善長)을 추가 배향하여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왔다.
그 뒤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나 1934년 지방유림의 공의로 복원하였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묘우(廟宇), 5칸의 강당과 삼문(三門)·포사(庖舍)·신도비·비각 등이 있다. 묘우에는 조상치를 주벽(主壁)으로 하여 조한보·조한영·조선장의 위패가 배향되어 있다.
강당은 중앙 3칸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는데,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강론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포사는 향례(享禮) 때 제수를 마련하여 두는 곳이다.
창녕조씨 문중서원으로 매년 3월 중정(中丁: 두번째 丁日)과 9월 중정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제품(祭品)은 4변(籩) 4두(豆)이다. 유물로는 조상치의 시호교지(諡號敎旨)인 홍패 1장이 있으며, 그 밖에 약간의 문집이 보관되어 있다. 재산으로는 전답 3,300평과 임야 3,160평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