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강원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청평산문수원기비 淸平山文殊院記碑〉에 따르면, “973년(고려 광종 24)에 당나라 선사(禪師) 영현(永玄)이 경운산(慶雲山) 아래에 창건하여 백암선원(白巖禪院)이라 하였다. 1068년(문종 22)에 춘주도(春州道) 감창사(監倉使) 이의(李顗)가 중건하여 보현원(普賢院)이라 하였다.
이의의 아들 이자현(李資玄)이 1089(의종 6)에 절을 고쳐지어 문수원(文殊院)이라 개칭하고, 8암자를 새로 지었으며, 산 이름을 청평산(淸平山)이라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청평산문수사시장경비 淸平山文殊寺施藏經碑〉에 따르면, 1327년(충숙왕 14)에 원나라 황후가 불경과 돈 1만 꾸러미를 시주하여 그 이자로 황태자와 황자들의 복을 빌고, 그들의 생일에 스님들께 음식을 올리는 반승(飯僧)을 행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1367년(공민왕 16)에 나옹화상(懶翁和尙)은 이 절의 복희암(福禧庵)에서 주석(駐錫)한 적이 있다. 김시습(金時習) 또한 이 절에 은둔하여 서향원(瑞香院)을 짓고 살았다. 이황(李滉)은 청평산을 지나면서 절에 들르지 못해 아쉬워하는 글을 남겼는데, 그는 이자현이 탐욕스러웠다는 역대의 사필(史筆)을 반박하였다.
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文貞王后)의 신임을 받았던 보우(普雨)는 능인전(能仁殿)만 제외한 모든 건물을 다시 짓고, 절 이름을 경운산만수성청평선사(慶雲山萬壽聖淸平禪寺)라 하였다.
이 때 그려진 탱화가 일본 히로시마(廣島)의 고메이사(光明寺)에 보관되어 있다. 이 가운데 현대까지 남아 있던 건물은 극락전(極樂殿)과 회전문(迴轉門)이 있는데, 극락전은 1947년에 불탔다.
1711년(숙종 37)에 환성화상(喚惺和尙)지안(志安)이 거의 전부를 중건하였다. 1728년(영조 4)에 각선(覺禪)이 삼존불상을 조성하였고, 1861년(철종 12)에 대웅전 즉 능인전이 소실되었다. 이듬해 능인전터에 요사(寮舍)를 지었으나 1880년(고종 17)에 소실되어 그 해 여름에 또 중건하였다. 1900년에는 익랑(翼廊) 10칸(間)을 지었다.
〈청평산문수원기비〉는 1914년에 극락전에 옮겨 보관해 오다가, 극락전이 소실되자 요사로 옮겼으나, 한국전쟁 때 이 건물이 폭격을 받자 비(碑)도 파손 매몰되었다.
1977년에 극락보전(極樂寶殿)과 삼성각(三聖閣)을 증건하였으며, 1979년에는 해탈문(解脫門)·청평보탑(淸平寶塔)·적멸보궁(寂滅寶宮)을 지었다. 1984년에 요사·청평루(淸平樓)·서향원을 새로 지었으며, 1988년에는 대웅전을 중창하였다.
해탈문 골짜기에는 ‘淸平仙洞(청평선동)·淸平息庵(청평식암)’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으며, 유물로는 고려시대의 삼층석탑(일명 공주탑)과 환적당승탑(幻寂堂僧塔) 외에 2기의 승탑이 있고, 영지(影池) 옆에는 오도송(悟道頌)이라 불리는 글귀가 바위에 새겨져 있다.
이 밖에도 계단이나 축대 등은 대개 그대로 남아 있다. 한편 이 절에는 상사뱀을 물리친 당나라 공주의 전설이 전해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