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3년(공민왕 12) 11월 판전의시사(判典儀寺事)로 홍건적을 방어한 공이 있어 2등공신이 되었고, 1370년 지용수(池龍壽)·이성계(李成桂) 등이 동녕부(東寧府)를 정벌할 때 그 비장(裨將)으로 선발대가 되어 공을 세웠다.
1374년 판서(判書)로 강릉도만호(江陵道萬戶)가 되어 왜구를 격파하였으며, 1375년(우왕 1)에는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이성상원수(泥城上元帥)가 되었다. 이듬해 7월 왜구가 연산 개태사(開泰寺)에 침입하여 노략질을 하자, 양광도도순문사(楊廣道都巡問使)로 최영(崔瑩)과 함께 홍산(鴻山)에서 왜구를 크게 격파하였다.
1377년 4월에는 서성군(瑞城君)으로 강릉도원수(江陵道元帥)가 되었고, 그해 8월에는 삼사우사(三司右使)로 의주원수(義州元帥), 이듬해 5월에는 평리상의(評理商議)로 양광도도원수가 되어 여러 차례에 걸쳐 왜구를 격파하였으나, 1380년 전라도조전원수(全羅道助戰元帥)로 있을 때 왜구를 막지 못하여 장류(杖流)되기도 하였다.
1383년 6월 강릉도체찰사(江陵道體察使)로 있을 때, 그 지역의 화척과 재인들이 왜구를 사칭하고 노략질을 하므로 이들을 소탕하였고, 그해 7월에는 교주강릉도도체찰사(交州江陵道都體察使)가 되어 방림역(芳林驛)에서 왜구를 격파하는 등 왜구 격퇴에 많은 공을 세웠다.
1388년 요동정벌 때에 조전원수(助戰元帥)로 좌군도통사(左軍都統使) 조민수(曺敏修)의 휘하에서 종군하였다가 회군하였고, 그 공으로 1390년(공양왕 2) 4월 전 충주등처병마절제사(忠州等處兵馬節制使)로서 공신에 책봉되었다. 그러나 다음달 중랑장(中朗將) 이초와 파평군(坡平君) 윤이가, 이성계가 명나라를 침벌할 계획을 세우고 있으며, 이성계에 의해 실각된 재상들이 명나라의 고려토벌을 바란다고 명나라에 보고한 윤이(尹彛)·이초(李初)사건에 관련된 혐의로 투옥되어 옥사한 뒤 효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