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창원(昌原). 아버지는 수태부 중서시랑평장사(守太傅中書侍郎平章事)를 지낸 최온(崔昷)이다.
음보(蔭補)로 산정도감판관(刪定都監判官)이 되고, 견룡행수(牽行首)에 임명되었다. 1258년(고종 45) 김준(金俊) 등이 권신(權臣) 최의(崔竩)를 제거한 일이 있었는데, 별장(別將) 최문본(崔文本)이 그 제거모의를 사전에 최의에게 누설하여 처형당할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아버지 최온이 김준과 함께 거사한 공로로 죽음만은 면하고 섬으로 유배되는 선에서 마무리되었다. 뒤에 풀려나 친종장군(親從將軍)을 역임하였다.
1271년(원종 12) 관노(官奴)인 숭겸(崇謙)과 공덕(功德) 등이 무리를 모아 다루가치(達魯花赤)와 국내에 관료로 있는 원나라 사람들을 죽이고 진도(珍島)로 도망가려고 하자 이들을 잡아 국문하였다. 1274년 충렬왕이 즉위하자 승선(承宣)이 되어 응방(鷹坊)의 횡포를 간하였으며, 1276년 밀직부사 판도판서(密直副使版圖判書)에까지 올라갔으나 이해에 죽고 말았다. 성품이 강직하고 대신(大臣)의 체모(體貌)가 있었으므로 몽고의 사신이 “너의 나라에 이 같은 자가 몇 사람이나 있느냐?”라고 물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