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수지(受之).
고려 말 생원·진사시에 합격하고 성균관학유가 되었다.
조선 개국 후 예문춘추관의 수찬관이 되었으며, 이어 광주목사(光州牧使)로 외직에 나갔으나 고과(考課) 때마다 가장 높은 등급을 받아 임기를 다 채우지 않은 채 1405년(태종 5) 의정부사인이 되었다.
근검하고 염직(廉直)하여 태종의 총애를 받아 동부대언에 제수되었으며, 세종에게 탁용(擢用)할 것을 명함으로 인하여 1421년(세종 3) 경기도도관찰사·인수부윤(仁壽府尹)이 되었다. 1423년 좌군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로서 천추사(千秋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예조참판이 되었다.
1428년 대사헌·경창부윤(慶昌府尹)·강원감사를 역임하고, 이듬해 경창부윤으로서 선위사가 되어 의주에 파견되었다. 이 해 한성부윤·황해도관찰사, 2년 뒤 개성부유후(開城府留後)가 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였다.
1434년 판광주목사(判廣州牧事)가 되고, 1439년 공조판서를 제수받아 이듬해 연로함을 이유로 치사(致仕)를 청하였으나 윤허받지 못하고 곧 이조판서가 되었다.
1443년 다시 공조판서로서 경기전봉안사(慶基殿奉安使)가 되어 전라도지방을 순회하고 돌아와 하삼도(下三道)지방에 설해를 입어 작황이 좋지 못하여 전품(田品)을 분정(分定)하기가 어려우니 경차관(敬差官)을 파견하고, 전품의 분정을 다음해 가을까지 미룰 것을 상소하였다. 1447년 노질(老疾)로 인하여 사직하였다. 시호는 정간(靖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