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년만」은 고려시대부터 조선 후기까지 궁정에서 연주하였던 당악의 하나이다. 『고려사』 악지에 악보가 없이 가사만 수록되어 전한다. 가사는 전단·후단을 갖춘 쌍조 45자[전단24자, 후단 21자]로 이루어졌으며, 작자는 미상이다. 곡이름에 곡조가 길고 박자가 느린 사(詞)를 가리키는 ‘만’자가 붙었지만, 가사가 45자에 불과하여 그 박자가 특히 느린 악곡에 속한다. 고려 이래로 조선 후기까지 「태평년만」 외에 「태평년지악」, 「태평년」, 「태평년지곡」 등으로도 불리었으나, 현재 실전되어 연주되지 않고 있다.
「태평년만(太平年慢)」은 고려시대부터 조선 후기까지 궁정에서 연주하였던 당악(唐樂)의 하나로 『고려사(高麗史)』 악지(樂志)에는 단독으로 가창하는 주1로서 악보가 없이 가사만 수록되어 전한다. 작자는 미상이다.
이 곡은 1367년(공민왕 16) 정월에 휘의공주(徽懿公主)의 혼전(魂殿)에 석명(錫命)을 고하였을 때 초헌에서 「태평년지악」이라는 곡 이름으로 연주되었는데, 이때 곡 이름에 ‘만’자가 생략된 것으로 나타난다.
조선조로 접어들어 1402년(태종 2)에 예조와 의례상제조가 함께 의논하여 올린 악곡들 가운데 당악 「태평년(太平年)」이 포함되어 있다. 당시 임금이 종친형제(宗親兄弟)들이나 여러 신하[群臣]들을 위하여 베푸는 잔치[國王宴宗親兄弟 國王宴羣臣] 등 국왕연사신악(國王宴使臣樂)을 제외한 모든 잔치에서 주2를 올릴 때[進俎] 「태평년」을 연주하도록 하였다. 이 때 연주한 「태평년」은 고려 전래의 「태평년만」인데, 곡 이름 뒤의 ‘만’자가 생략되었다.
이후 세종대에는 「태평년」, 「태평년지악」이라는 명칭으로 불리었으나 성종대의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당악 악공의 취재곡목으로 여전히 「태평년만」이라는 곡이름으로 기록되었다. 이후로 순조 때까지 「태평년」, 「태평년지악」, 「태평년지곡」이라는 명칭으로 혼칭되었지만, 근본적으로 「태평년」이라는 원래의 명칭을 벗어나지는 않았다. 이 곡은 현재 실전되어 연주되지 않고 있다.
악보가 없이 가사만 전하기 때문에 그 악곡의 실체를 알 수 없지만, 곡이름에 붙은 ‘만(慢)’자를 통하여 그 악곡의 일면을 추정할 수 있다. 곡이름에 붙은 ‘만’은 ‘만사(慢詞)’의 뜻으로 ‘만곡자(慢曲子)’로부터 유래한 명칭이다. ‘만사’는 느린 악곡[만곡(慢曲)]에 가사를 지어 넣어 곡조가 길고 박자가 느린 사(詞)를 가리킨다.
일반적으로 사(詞)는 단조(短調)[홑단], 쌍조(雙調)[전단과 후단 두 단으로 구성], 삼사첩(三四疊)[3단 혹은 4단으로 구성]에 관계없이 전체 글자 수에 따라 58자 이내를 소령(小令), 59자~90자를 중조(中調), 91자 이상을 장조(長調)로 구분하는데, 대체로 ‘만’은 자수가 많은 장조와 결부된다. 그러나 「태평년만」은 만임에도 불구하고 45자에 불과하여 일반적인 형식에서 꽤 벗어났다. 이 사가 지어질 때 작가가 만(慢)으로 부르던 기존 사패(詞牌)에 자신의 사를 전사해 넣은 것으로 추정된다.
「태평년만」은 가사를 보면 전단 · 후단을 갖춘 쌍조(雙調) 45자[전단 24자, 후단 21자]로 이루어졌다. 느린 악곡에 글자 수가 45자에 불과한 가사를 붙여 이룬 곡이므로 그 악곡이 매우 느린 곡임을 알 수 있다. 즉 「태평년만」은 속도가 느린 일자다음(一字多音)의 악곡으로서 모음의 변화를 통하여 그 선율이 완연굴곡(宛然屈曲)을 이룬다.
전단
황주춘만군방려(皇州春滿群芳麗)[서울에 봄기운이 가득하니 뭇 꽃이 아름답고]
산이향의니(散異香旖旎)[기이한 향기가 흩어져 깃발 펄럭이듯 날아오르네]
오궁개연상가치(鼇宮開宴賞佳致)[궁전에서 잔치를 열고 좋은 경치를 즐기는데]
거생가정비(擧笙歌鼎沸)[음악을 시작하니 솥에서 물이 끓듯 매우 요란하네]
후단
영일지지화풍미(永日遲遲和風媚)[지루한 긴긴 날에 부드러운 바람이 아양을 떠는데]
유색연응취(柳色烟凝翠)[버들과 안개가 푸르게 엉겼네]
유공일서추(唯恐日西墜)[오직 해가 서쪽으로 떨어짐이 두렵나니]
차락환취(且樂歡醉)[잠시라도 더 즐겁게 취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