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6년(충렬왕 2) 참문학사(參文學事) 김구(金坵)의 건의로, 당시 통역관인 설인(舌人)이 대부분 미천한 신분으로 지식이 풍부하지 못하고 또 통역할 때 사리(私利)를 도모하는 등의 폐단이 있어 이를 시정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다.
이에 앞서 역어교육을 담당한 최초의 관서로서『삼국사기』궁예열전에 ‘사대(史臺)’에 관한 기록이 보인다. 통문관의 설치동기가 설인들의 폐단 때문이라는 점으로 미루어볼 때 통문관설치 이전에는 설인들을 관리하는 국가적 차원의 공식기구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몽고와의 강화로 사신내왕이 빈번하여지자 통역사무를 전담하는 기구인 통문관을 설치하여 비서성(秘書省)·사관(史館)·한림원(翰林院)·보문각(寶文閣)·어서원(御書院)·동문원(同文院) 등 금내학관(禁內學官)의 6품 이하직에 있는 40세 미만자를 선발하여 한어(漢語 : 몽고어)를 습득하게 함으로써 통역사무의 질적 향상을 꾀하게 되었다.
그러나 실제 역관으로 현달한 조인규(趙仁規)를 비롯하여 원나라 있는 고려인이나 내주자(來住者)들이 역인으로서 대부분의 통역실무를 맡았으므로 통문관을 통한 역관교육의 실효성은 의심스럽다.
그리하여 고려말에 이르면 통문관을 대신하여 전문기관으로 사역원(司譯院)을 두어서 역어를 관장하게 하였다. 조선시대에까지 존속되었던 사역원은 몽고어·한어를 비롯한 여진어(女眞語 : 淸學)·왜학(倭學) 등 여러 외국어의 통역과 번역 실무를 맡았을 뿐만 아니라 중국방면에서 들어오는 과학·기술의 수용에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 사역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