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대의 지방교관직을 보면, 주(州)와 부(府) 같은 계수관에는 교수(敎授)와 훈도(訓導)[혹은 교수관과 훈도관]를 두었는데, 문과 출신 6품 이상의 참상관은 교수라 칭하고 7품 이하의 참하관으로 파견된 교원은 훈도라 칭했으며 이들은 모두 녹관(祿官)이었다. 교수와 훈도가 파견되지 않은 고을에서는 지방 수령이 자신의 고을이나 인근 고을에서 학식과 명망이 있는 자를 학장으로 임명하여 그 지역의 교육을 관장하도록 했고, 생원과 진사로서 지방 고을의 교관으로 선임된 자는 학장이 아니라 교도(敎導)라고 불렸다.
조선 초기의 경우, 아직 향교가 건립되지 않은 군현들이 많았으며, 500호를 기준으로 순차적으로 향교를 건립하였다. 향교가 건립된 고을에는 대체로 생진(生進)인 교도가 선임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렇지 않았던 고을은 지방관이 자치적으로 학장을 선임하여 고을의 문교를 담당하도록 하였다. 이들은 녹봉도 없고 사로(仕路)에 진입한 관인(官人)도 아니었기 때문에 전최와 포폄의 대상이 아니었다. 교육이라는 공무를 수행하는 명예직 민간인의 성격을 띤 학장제는 지방교육체제와 교관제도가 완비되지 못했던 선초의 조건을 배경에서 시행되었는 제도였다고 할 수 있다.
이후 태종~세조대를 거치며 거의 모든 군현에 향교가 세워지고, 지방의 모든 향교에 교수와 훈도를 파견하도록 지방교관제도가 정비되어 그 제도가 『경국대전』에 수록됨으로써, 15세기 학장제는 사라진다.
16세기 중종대 초반 기묘사림들이 활동하던 시기에 각종 교육 현안들을 논의가 활발히 진행되었는데, 이때 한양 사부학당과 지방의 향교 단위 이하의 교육과 아직 관학(官學)에 입학하기 이전 나이의 동몽(童蒙)들의 교육을 위한 논의도 아울러 진행되었다. 그 결과 한양에는 동몽훈도를, 지방에는 학장을 두는 새로운 제도가 마련되었다.
학장제에 대한 명문화된 규정은 1546년(명종 1) 4월에 반포된 「경외학교절목(京外學校節目)」에 나온다. 이 절목의 규정에 따르면, 학장은 각 고을의 8세에서 16세 이하 동몽을 대상으로 『소학』을 가르치고 점차 구두에 밝고 문리를 조금 터득하면 『대학』 · 『논어』 · 『맹자』 · 『중용』을 차례로 가르쳐 향교에 올리는 역할을 하였다. 이들은 지방관이 차임하였으며, 관찰사가 봄 · 가을로 순행할 때 학장의 교육활동을 점검하고 평가하고, 교육에 성과가 있는 학장은 관찰사가 예조에 보고하여 서용할 수 있는 길을 열어두었다.
15세기 학장제가 실제 어느 정도 정착되었는지는 실록의 기록만으로는 고증하기 쉽지 않다. 학장은 중앙정부가 관리하는 관리가 아니었기 때문에 지방관의 교육에 대한 의지와 열성에 따라서 시행의 여부와 활성화 정도는 고을마다 차이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선조실록』과 『승정원일기』, 『과시등록』 등의 관공문서에 학장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으며, 17세기 문헌에서도 일부 학장제 운영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18세기 조현명의 「권학절목」 등에서 발견되는 도훈장-면훈장-리훈장 제제는 16~17세기 학장제를 포함한 지방교육제도의 제도적 변용이라는 측면에서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