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보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전기에, 동지중추부사, 한성부우윤, 도총부도총관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장보(障父), 한보(韓堡)
이칭
낭성군(琅城君)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447년(세종 29)
사망 연도
1522년(중종 17)
본관
청주(淸州)
주요 관직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동지중추부사|한성부우윤|도총부도총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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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전기에, 동지중추부사, 한성부우윤, 도총부도총관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장보(障父). 한보(韓堡)로 쓰기도 한다. 예문춘추관대학사 한상질(韓尙質)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감찰 한기(韓起)이고, 아버지는 영의정 한명회(韓明澮)이며, 어머니는 증우의정 민대생(閔大生)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기골이 장대하고 활쏘기와 말달리기에 능하였다. 13세 때 음보(蔭補)로 용양위수사정(龍驤衛守司正)에 초자(初資)되었다. 그 뒤 여러 차례 승진하여 충무위호군(忠武衛護軍)이 되었으며, 1462년 세자익위사우사어(世子翊衛司右司禦)·사섬시소윤(司贍寺少尹)에 이르렀다.

이듬해 통례원사(通禮院事), 1465년 의흥위섭호군 겸 판통례문사(義興禮攝護軍兼判通禮門事), 1466년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고 1469년(예종 1) 낭성군(琅城君)에 봉하여졌다.

1471년(성종 2) 좌리공신(佐理功臣) 4등에 책록되어 동지중추부사가 되고, 이듬해 한성부우윤, 1475년 공조참의 겸 도총부도총관이 되었다가 양모(養母) 조씨(曺氏)에게 불효하였다 하여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1476년 복직되었고, 1492년 천추사(千秋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515년 치사(致仕)하여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공신의 아들이면서도 스스로 처신을 삼갔을 뿐만 아니라 자손에게도 몸을 삼갈 것을 경계하였다.

참고문헌

『예종실록(睿宗實錄)』
『성종실록(成宗實錄)』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중종실록(中宗實錄)』
『용재집(容齋集)』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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